현생을 그럭저럭 살다가도, 가을엔 꼭 한번 느꺼운 기억들이 목구멍을 넘어요.

  돈 아껴보겠다고 열심히 히치하이킹 하던 거, 버려진 대나무통에 구멍 뚫고 나뭇가지 박아서 레인스틱* 만들던 거, 기숙사 뜨거운 물로 초콜릿 중탕해서 빼빼로 만들던 거, 소풍날 새벽에 같이 김밥 싸던 거, 누구에게나 안기고 포개던 거, 하야티랑 망고 보드카 마시다 취해가지고 서로 몸에 헤나 해준 거, 주를 여는 시간, 식구총회, 펴라, 연애, 그 시절 검정치마.. 부러 외운 것도, 새긴 것도 아닌데 아직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약하게 진동하는 것들.

*기울이면 빗소리가 나는 남미 안데스 지역 악기

  “정말 행복했어요. 애인과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께서 예쁘고 푸르다며 용돈을 주셔서 그 길로 진주에 가 평소보다 조금 더 맛있는 걸 먹었어요!” 지금 떠올려도 행복을 우주가 도와주는 것 같았던 날들이 현대 서울에서 가능키나 하냐고요. 그 시절 외송리여서 가능했던 일들이라면, 한껏 음침해진 저는 저항 없이 그곳으로 돌아가서 코를 킁킁거립니다. 졸업을 한 지 8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사랑과 낭만과 사람이 전부인 나에게, 이제는 밤 아홉 시 삼십 분에 별 보러 가자고 부르는 그 누구도 없는걸요. 간디와 친구들 빼고. 별 보러 가자는 자신에게 취한 나르시시스틱 로맨티스트들도 빼고.

  몇 년 전에 우연히 캡짱 맘에 드는 밴드와 함께 공연을 하게 됐었어요. 태곳적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박제될 거라 외치는 그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어떻게 그런 가사를 써요?” “저 너무 벅차서 조금 울었어요.” “꼭 그 감성 잃지 말아 주세요!” 하며 주접을 떨다가, 그들이 금산간디학교 출신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묘한 아쉬움이란- “아…간디 스멜 오지네요.” 

  간디와 친구들 말고도 나를 벅차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근데 진짜 웃긴 게요. 저희가 졸업여행을 갔을 때 ‘1년 뒤 나에게 보내는 편지’ 부스가 있어서 친구들이랑 줄줄 편지를 썼거든요.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한 줄이 정확히 기억나요.

  “다 아름답게 미화돼서 막 그립고 아련하겠지만, 기억해. 좆같은 일 졸라 많았어.”

  그 충고를 기억하며, 그리움이 치사량에 가까워지면 좆같았던 일도 함께 떠올려 보아요. 

  당시만 해도 부재했던 페미니즘과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 자기비하, 간디병, 빻은 연애, 가난한 영혼들이 미친 매력의 소유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고자 벌인 개싸움, 흑역사-! 으아아아 나한테 미안하다 하고 싶지! 나도 미안하다! 서로 미숙했는데 제발 그냥 퉁 쳐주자! 

  만나도 꺼낼 수 없는 쪽팔린 기억들이… 많죠. 실로 좆같았습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요. 차피 다신 겪지 않을 일이니 말하자면 오늘의 저는, 거의 단말마의 주문 마냥 저 문장을 눌러쓰던 당시의 미루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나름 최선의 충고를 해주어 고맙지만 역시 미화돼 버렸다고. 하하하핫.

  온 힘 다해 아프고 못나고 찌질했던 자신&주변과 어찌저찌 살아본 경험이, 욕 나오는 세상에서 나를 덜 괴롭게 살리고 있기에 그 시절을 지나준 나에게 고맙지 않을 수 없다고. 

  그래도 마냥 좆같아서 안 그리운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이 정도면 기대했던 것보다 너그럽고 단단한 어른이 된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리운 일도 그립지 않은 일도 겪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해요. 

  적어도 저는 그 시절 덕분에 가난할 뻔한 마음이 풍요로운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시절을 잘 소화 시켜 보고 나니 모든 그리움과 괴로움이 봄날의 꿈이에요. 모든 순간은 봄날의 꿈이 될 수 있달까요. 돼버린달까요.

  그러니까 음.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더 행복할게요. 감사합니다.

내 인생에 지름길 따윈 없어

  안녕하세요! 아일랜드와 호주를 거쳐 캐나다에 정착해 조경관리사로 일하고 있는 14기 졸업생 송해인입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지름길 따윈 없었던 제 20대 이야기, 그리고 워킹홀리데이를 고민 중인 간디인들을 위한 소소한 정보를 나눠볼까 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마냥 영어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영어에 대한 애정과 공교육의 현실은 종종 충돌할 때가 있었죠. 12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영어는 분명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마음 한 켠에 항상 아쉬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간디학교 졸업 후 돈은 없고 남는 건 시간뿐이었던 저는 어렴풋이 들어만 봤던 ‘워킹홀리데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돈 벌면서 영어를 써볼 수 있다니! 그것도 외국인들이랑! 공짜 어학연수나 다름없다 생각했기에 무작정 계획부터 세웠습니다. 넉넉한 초기 자금을 벌고, 네이버 카페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남들이 그렇게 살기 좋다던 캐나다에 드디어 지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작위 추첨 4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넘지 못해 1차에서 광탈해버리죠. 이듬해 다시 지원, 또 탈락하고 맙니다. 아주 큰 걸 간과해버렸는데요. 바로 워홀은 준비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애석하게도 대단한 운과 타이밍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게 다 준비되었는데도 2년이라는 시간을 날렸다는 허무함 그리고 억울함에 북미쪽으로 오줌도 누지않겠다고 다짐하며 다른 나라를 찾아보던 중, 유럽이라는 지리적 이점에 끌려 아일랜드 워홀에 도전하게 됩니다. 경쟁률은 8 대 1,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운이 몰빵되었는지 덜컥 붙어버렸고 그렇게 저는 비관론자에서 운명론자가 됩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아일랜드에서 첫 워홀을 시작했습니다. 말이 되든 안되든 초등학교 때 배웠던 단어까지 영끌해가며 ‘어차피 난 원어민도 아닌데 뭘’이라는 마인드로 알바와 유럽여행을 병행했습니다. 어학연수 없이 마냥 놀기만 했는데 어떻게 영어가 늘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답은 하나밖에 없더라구요. 바로 내가 스스로 선택한 배움에는 좀 더 탱탱한 지속성과 즐거움이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해외에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중, 결국 애증의 캐나다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통장은 텅텅 비어있었고, 다시 돈을 벌러 시급이 높기로 유명한 호주로 떠났습니다. 첫 워홀 때와는 다르게 놀지도 않고 2년 내내 정말 돈만 모았습니다. 그렇게 유학 자금을 다 모으고 나니 코로나가 터지고 말았네요 (눈물이 나서 중간 생략) 어찌저찌 결국 캐나다로 왔고 컬리지를 마친 후 현재 영주권을 준비하며 애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는 중입니다.

  그렇게 3개국을 돌며 별의별 시행착오를 다 겪은 사람으로써, 워홀을 고민 중인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현실적인 조언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영어권 나라에 한정된 정보만 담았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1. 미루지 말기: 워홀을 막연히 고민만 하고 계신다면 요즘 유튜브에 많은 후기가 나와있으니 한번 찾아라도 보세요. 오 좀 설렌다? 그럼 이제 나라별 신청 일정을 검색해 보세요. 긴 고민 끝에 마음먹고나니 이미 신청 기간이 지나있다든지, 신청을 해도 저처럼 운이 안 좋아서 떨어진다든지, 내가 준비만 되었다고 갈 수 있는건 아니더라구요. 조금이라도 마음이 생겼을 때 실행력 없이 미루신다면 결국 시기를 놓치게 될 수 있어요.
2. 워킹 vs 홀리데이: 일과 여행 그 중간에서 밸런스를 찾는 게 정말 중요해요. 제 아일랜드 워홀이 일하면서 영어 써보기+유럽여행이 목적이었다면, 호주 워홀은 오로지 돈만 벌러 갔거든요. 둘 다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처음부터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라별로 시급/주어지는 비자기간/여행 다닐 수 있는 범위가 다 다르기 때문에, 계획을 짤 때 내가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잘 고민해 보세요.
3. 가능성 높이기: 워홀은 나라당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이 1차 추첨 통과 후 2차 서류 진행을 포기한다면 다음 기회에 또 지원이 가능해요 (국가마다 다르니 꼭 확인하세요!). 그 말인즉슨 여러 나라들에 동시 지원해 확률을 먼저 높이고, 1차 합격 후 정말 갈 건지 말 건지를 나중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다는 거예요. 특정 한 국가가 아닌 그냥 ‘영어권 국가 워홀’을 원하신다면, 저처럼 한 군데 지원하고 주구장창 기다리지 마시고 적어도 두세 군데로 가능성을 열어두시는 걸 추천해요.
4. 초기 자금: 보통 나라별로 최종 합격 후 3개월 ~ 최대 1년이라는 출국 준비 기간을 줍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합격 후 돈을 더 모아갈 수도 있으니, 초기 자금 넉넉하게 모으려고 신청 시기를 괜히 후년으로 미루실 필요는 없어요. 특히 부모님이랑 사시는 분들은 굳이 서울 월세방 잡아서 알바하지 마세요. ‘얹혀사는 불효자 = 돈 벌 수 있는 최적의 조건’ 이 공식을 기억합시다.
5. 언어: 많은 분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겠죠. 해외 생활 6년 차로써 말씀드리자면, 도움이 필요할 때 모르는 사람 붙잡고 단어 몇 개로 쭈뼛쭈뼛 물어볼 수 있는 정도의 실력과 용기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자금이 여유로우신 분들은 친구도 사귀고 귀도 트일 겸 워홀 첫 두세 달 동안 현지 영어학원에 다녀보는 것도 추천드려요.

  워킹홀리데이는 유학이나 이민에 앞서 그 나라가 정말 나에게 맞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 특성상 다양한 경험을 해본 졸업생들이 많은 만큼 서로가 연대해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 주변에 많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세요. 나라별 장단점이나 유학에 대해 궁금하신 점은 언제든 편하게 연락주시구요(@haeinyee).

  마지막으로 워홀과 유학을 준비하던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12기 엔젤 임동혁, 13기 최정호, 제천간디 아롬언니에게 늦었지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