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15기 김연진입니다. 3년 반 동안의 건축사사무소 생활을 끝내고 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친구들이 저를 생각할 때 건축을 바로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3학년 인턴십도 폐가 고치는 협동조합과 건축문화재단으로 갔고 건축학과 진학 후 바로 건축사사무소에 취업했기 때문입니다. 어휴, 제가 생각해도 건축 말고는 대화가 안 통할 것 같은 답답한 사람 같은데요, 저의 건축 외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건축가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중학생 때입니다. 포털사이트에 뜨는 ‘혁신적인 가구 디자인’ 이런 걸 즐겨보곤 했는데 대부분의 가구 디자이너들이 건축가더군요. 간디에 와서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제 미래가 자연스럽게 보이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간디를 다녀도 직업에 대한 계시! 를 받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놓이는 것이 불안했던 저는 나름 신중하게 제 적성과 취향을 분석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얕은 관심이 있고 예술을 하고 싶지만 몰두하고 싶진 않아. 이렇게 낭만 없을 수가요. 확실히 저는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모험을 즐기는 타입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제 과거의 선택에 감탄합니다. 나에게 건축이 딱이구나! 

  건축설계로 취업을 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아뜰리에라고 불리는 1-20명 규모의 소규모 사무실과 몇 백명의 직원이 있는 대형 사무소입니다. 소규모 사무실에서는 주로 근생이나 주택을 짓는다면 큰 사무소에서는 아파트, 오피스, 공연장, 쇼핑몰 등 큰 건물을 설계합니다. 아뜰리에에서는 짧은 주기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만, 큰 사무소에서는 진행 기간이 길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에 처음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의 성격과 규모와는 상관없이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은 비슷합니다. 건축주가 땅을 들고 오면 용도와 높이, 면적을 검토 후 최적의 안을 제안합니다. 대략적인 합의점이 도출된 후에는 각종 허가를 받습니다. 입면이 도시에 어울리는지,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은지, 친환경적인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잘 대응할 수 있을지 등 수많은 인허가를 통과하기 위해 협력업체들(인테리어, 조경, 구조, 소방, 기계 등)과 끊임없이 협의합니다. 도면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쏟는 부분이 이런 협의이기에 다양한 분야에 관한 지식과 소통능력이 요구됩니다. 이 외에도 디자인 감각과 이미지 제작능력이 필요한 것이 건축설계업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도시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경험하는 동시에 워라밸과 금전적인 보상을 누리고 싶어서 대형 사무소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입사한 회사는 1200명이 넘는 아주 큰 회사였습니다. 1000명의 건축가들이 있는 곳이죠. 큰 조직의 자본과 체계,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자부심, 저는 이 압도적인 분위기에 굉장히 빨리 도취되었습니다. 하루 8시간의 정해진 시간 동안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 사람들에 치여 출근해서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고 점심 식사 후 회사 가십을 떠들다 오후 회의하는. 저는 이런 평범한 일상에 성공적으로 스며든 것이 뿌듯했고 그 무료함을 즐겼습니다. 

  처음에는 업무적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내가 만드는 건물이 도시의 풍경을 몇십 년간 책임 진다니 가슴이 뛰지 않나요. 하지만 제 디자인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실망스러운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우리는 시행사, 은행, 건설사를 위해 일합니다. 그들이 땅을 사면 우리는 엑셀과 계산기를 두드려서 몇 세대가 이 땅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계산해 줍니다. 인허가청을 어떻게 구슬려야 최고 높이로 지을 수 있을지 전략을 짭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땅에는 원래 있던 공간을 사랑하는 원주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땅주인을 위해서 새로운 건물을 세워야 합니다. 부동산이 곧 화폐단위인 이 작은 나라에서는 공간의 질이 아닌 공간 체적 자체로 돈이 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방을 만드는 것을 요구받습니다. 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꼈지만 곧 타협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런 무력감 속에서도 현실과 이상향을 잘 조율해 내는 많은 건축가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성격이 급해서일까요, 문제를 돌파하는 지름길을 찾고 싶었고 지금은 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사한 상태입니다. 자본과 공공이 공존하는 방법, 모두에게 윤택한 환경을 제공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건축계에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들 각자 해소하는 방법이 달랐는데요. 공간을 기획하는 주체인 시행사로 이직하거나 도시정책을 결정하는 공무원이 되는 등 건축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각양각색입니다. 지금까지 건축가라 하면 자본과 거리를 두고 건축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모범적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한국의 도시개발이 그래도 조금씩 성숙해지면서 건축을 배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적감각이 있고 공간 윤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시를 가꾸는 역할을 더 많이 맡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확고한 장래희망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온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자로 걸어온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비틀거렸던 순간들도 많아요. 부족한 글 솜씨로 지면에 다 담지 못했으니 궁금한 점이 있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분은 편하게 메일로 연락 주세요. (ella0285@naver.com)

  *지금 서울에서는 헤더윅 전시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데요, 건축에 관심 있는 분들이 보면 재밌어하실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없던 지도

오늘 처음 만나 뵙는데, 인스타그램에서 진하 님이 본인을 ‘모험가 장진하’라고 소개하신 걸 봤어요. 

요새는 ‘모험가 장진하’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쓰고 있어요. 모험하면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정글 가고, 신대륙 찾아서 헤매고, 이런 모험 이야기를 되게 좋아했어요. 좀 부러워했다고 그래야 될까요? 사실은 자기를 소개하는 게 아직 어렵고,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있는데 그게 과연 되고 있나?’ 이런 것도 매번 고민이에요.

보통 모험이라고 하면 전설 속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떠난다거나 하는데, 진하 님의 모험은 어떤 걸 찾아 떠나는 모험인가요? 

제가 하고 싶은 것,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건 ‘쉽게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떤 걸 처음 할 때는 좀 무섭고 내가 이걸 해도 되는지 망설이기도 하는데 같이 하면 쉽게 할 수 있잖아요. “그냥 별거 아니야. 일단 같이 해보자.” 이렇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어떤 걸 새로 할 때 비교적 쉽게 하는 편이에요. ‘일단 해보지 뭐’ 하는 성향이 있어서요.

말하자면 ‘도전’에 적성 혹은 재능이 있으신 거네요.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웃음)

지금까지는 조금 막연한 소개이기도 한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계신지 얘기해볼까요.

우선 올해 대학교를 졸업했어요. 지금까지는 고등학교 때 이어진 인연으로 ‘가제트 공방’이라는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오래 일을 했고요. 행사 같은 데 가면 설치된 부스나 무대 구조물이 있잖아요. 나무 팔레트를 레고처럼 조립해서 임시 구조물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바느질 워크숍 같은 걸 진행했기도 하고요. 

‘가제트 공방’과는 어떻게 인연이 시작된 건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선택 이동 학습’을 가면서 친구와 공예, 만들기 같은 제를 가지고 이동학습을 기획했거든요. 주변에 목공 관련 일하는 사람을 찾다가 제가 ‘성미산마을’에 살 때 건너 건너 알게 된 목수 분께 연락을 드리게 됐어요. 그분이 ‘가제트’예요. 나중에 대학 다닐 때 그분이 페이스북에 알바 공고를 올리시는 걸 보고 연락해서 시간 맞을 때마다 같이 일하게 됐죠.

훨씬 이전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성미산 마을에서 자라셨다고요.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지냈어요. 중학생 때까지 성미산 학교를 다녔고요.

대표적인 마을공동체이자 마을 교육을 실천하는 곳 중 하나라고 알고 있어요. 성미산 마을에서 자란 건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좋은 점도 있었지만 힘든 점도 있었죠. 예를 들면 소문이 정말 빨리 퍼지고 ‘누가 누굴 좋아한다더라’ 이런 걸 부모님이 다 알고 계시면 너무 민망하잖아요. 감시받는 기분이기도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엄청 안전한 환경이기도 했죠. 저는 학교가 끝나면 마을 돌아다니면서 아무한테나 치대고 이러면서 컸어요. 자전거포 가서 새로 들어온 자전거 없는지 보고, 거기서 요구르트 하나 얻어먹고. 또 옆에 생협 가서 외상으로 사 먹고, 그 옆에 ‘되살림 가게’ 가서 안쪽 방에 누워서 놀다가 천 생리대 만드는 거 좀 도와드리다 집에 가고. 그런 면이 저한테 좋은 영향을 끼쳤던 부분도 많죠.

마을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이유로 간디고등학교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두려움이 좀 있었어요. 대안학교라는 게 사회에서 너무 소수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서 커서 뭐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도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으니 인가 대안학교에 가면 좋겠다고 하셨죠. 벌써부터 선택지를 줄이지는 않으면 좋겠다고요.

좀 더 큰 사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컸어요. 당시 성미산학교 고등 과정 인원이 다 합쳐도 10명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수업도 다양하지 않고, 좀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멋진 선배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이전에 비해서 간디가 훨씬 큰 사회였군요. 

훨씬 넓었죠. 저한테는 너무 잘한 선택이었어요. 어떻게 그랬나 싶을 만큼 많은 걸 했고 저한테는 완전 놀이동산이었어요. 수업도 많지, 동아리도 많지, 인원도 10배고 거의 다 또래잖아요. 할 수 있는 것들의 폭이 너무 늘어나서 신이 났죠. 멋진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당시 진하 님에게 무엇이 멋진 것이었는지 혹은 무엇이 멋지지 않아 보였는지 궁금해요.

일단은 성실한 거. 뭔가 자기 일하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보였어요. 설령 수업에 빠져도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던 것 같아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고등학교 시절을 아주 알차게 보내셨을 것 같아요. 주로 어떤 일을 하며 3년을 보내셨나요?

다양한 주제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고등학교 이전까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잡식하듯이 이것저것 마구 했어요, ‘솔뫼바람(풍물 동아리)’이나 ‘프레임(학교 앨범 동아리)’도 3년 내내 했고. ‘쫑크*의 바다낚시’라고 한 학기에 한 번씩 바다에 낚시를 가는 행사인데 새벽 5시쯤 출발해서 쫑크랑 같이 남해 가서 갯바위에서 밤새 낚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막 텐트 치고 자고 라면 끓여 먹고… 학교에서 이런 걸 한다는 게 저한테는 충격이었어요.

*농사 교과 담당 문종학 선생님

여러 방향으로 세계가 확장되는 시기였겠어요. 간디에서 가장 크게 변화한 부분은 어떤 건가요?

관계인 것 같아요. 넓어졌고 많아졌고 다양해졌다.

다양한 활동을 열정적으로 한 친구들이 오히려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더 많기도 하더라고요. 진하 님은 어떠셨어요?

저도 그랬어요. 저는 원래 대학교를 안 가려고 했었어요. 그 시간과 돈과 기회비용으로 다른 걸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근데 좀 어이없는 이유로 대학에 가게 됐는데요. 수시철에 자기소개서 쓰는 기간이 있잖아요.  그때쯤 친구들이 갑자기 막 글을 쓰기 시작하더니 쌤들한테 다시 자기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 받고 이러는데 그걸 보니까 약간 부러운 거예요. ‘이때를 지나면 언제 쌤들이 내 글을 봐주지? 그럼 나도 뭐 써보기나 할까?’

독특한 이유네요.(웃음) 

왜냐면 그때는 회사도 안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대학교도 지금 갈 생각이 없고 이러니까 누군가한테 나를 보여주는 글을 써보는 기회, 또 누군가가 글을 봐주는 상황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어떤 과를 지원하지? 이러다가 자기소개서 쓰면서 ‘나 사실 여기에 관심 있었을지도…?’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흥미를 느낀 학과 전공은 뭐였나요?

사회학과에 지원했어요. 제가 가진 마을에 대한 경험이나 자라면서 공간이랑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 같은 걸 가서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한 욕심에서 시작해서 썼지만 썼으니까 내봤고, 냈는데 합격이 돼서 그러면 1년이라도 다녀보자, 이렇게 됐죠.

언뜻 들으면 대학 진학이 그냥 수월하게 진행된 것 같지만, 아마 진하님이 스무 살까지 해온 일들이 힘을 발휘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봤을 때는 활동 경력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쪽 입장에서도 제가 가진 스토리나 이런 게 흥미로웠지 않았을까요? 계획하고 만든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된 거 같아요. 

고등학교도 전보다는 더 넓은 사회였는데 대학은 훨씬 넓은 사회잖아요.

훨씬 넓은 사회인데 오히려 넓게 지내지 않았어요. 간디에서는 120명을 다 만나는 느낌이었다면 대학교 때는 내가 실제로 접촉하는 사람은 더 줄었기 때문에. 저도 사람에 대한 관심이 줄어서 아쉽지가 않았어요.

십 대의 대부분을 공동체 안에서 보내셨으니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 같아요.

피로했어요. 애들이 시간표를 서로 맞춰서 짜고, 밥도 같이 먹으러 가고 이러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수업도 혼자 듣고 그냥 혼자서 하고 싶은 거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나름대로 친해진 친구들도 있었고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흥미를 느끼고 선택하셨는데, 학과 공부는 어떠셨어요? 

처음 1년은 진짜 재밌었어요. 정말 정말 재밌었던 게 제 평생 동안 배웠던 모든 게 어떤 학문적 토대 위에 세워졌구나 하는 걸 배운 거예요. 알 깨기처럼. 어떤 과정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 시작했고, 어떤 사상이 이렇게 시작됐고… 그리고 정치학 같은 경우에는 간디의 식구총회랑 너무 똑같은 거예요.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어떤 수법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식구총회에서 마지막 순서로 발언하면 효과가 좋다거나, 어떤 안건을 준비할 때도 1학년 때는 그냥 나갔다면 3학년쯤 되면 미리 대자보도 붙이고 뒤에서 “야, 이런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이렇게 여론을 만든 다음에 나가잖아요.(웃음) 근데 그게 다 정치학개론에 나와 있더라고요.

그런 게 공부가 주는 기쁨 중 하나인 것 같아요. 1학년 이후로는 마음이 달라지셨나요?

1년 뒤에는 조금 흥미가 떨어졌어요. 수업이 재밌었던 것과 별개로 시간 맞춰서 과제 내고 평가 받고 이런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1도 모르겠는데 제한 시간 안에 10을 써내야 하는 게 압박이 심하더라고요. 자신을 부풀려서 글을 쓰는 게 힘들었어요. 한 번은 너무 지쳐서 기말고사를 그냥 포기한 학기도 있었어요.

진하 님이 그런 부분들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해요. 내가 받아온 교육 안에서 특정 부분이 강화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타고난 성향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천성 쪽인 것 같아요. ‘이것을 못한다’가 아니라 ‘이것에 안 맞는 사람인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을 선택한 것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었어요. 주변에 대학 비진학을 선택한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대학이 되게 쉬운 선택, 바로 사회로 나가는 게 두려워서 그걸 유예하는 어떤 행위가 아닐까라는 고민이 계속 있었죠.

올해 졸업하셨다고 하신 걸 보니 중간에 휴학을 하셨나 봐요. 

맞아요. 근데 제가 딱 코로나 시기에 휴학을 했거든요. 그 해 어디든 외국에 나갈 생각으로 조금이지만 돈도 모아놨었고 그랬는데 너무 억울한 거예요. 저는 학교생활보다도 중요했던 게 여행이었거든요. 원래는 학기 중에 알바하고 작은 거 하나하나 아껴서 한 100만 원 모으면 방학 때 한 달씩 여행하고, 여행을 기준으로 일 년을 살았거든요. 모아둔 돈도 다 쓰고 언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게 되면서 결국 그냥 복학을 했죠.

몸을 움직이고 낯선 곳을 다니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시는군요. 

그래서 가제트 공방 일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축구 열심히 하고.

이동학습 때 가장 살아나는 친구였을 것 같아요.

엄청 좋아했어요. 1학년 때 제주 도보 여행 갔을 때 애들이 다 힘들어하잖아요. 저는 너무 좋은 거예요. 막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간식 주면 ‘간식을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냐?’(웃음) 입이 단데 막 이만큼씩 주잖아요. 안군이 ‘너한테 학교가 너무 작다’ 이런 얘기를 했던 게 인상 깊어요.

지리산 종주도 항상 제일 어려운 코스 가는 친구…(웃음) 

맞아요. 근데 그냥 같이 한다는 게 좋았어요. 서로 도와주고 같이 올라가고 그런 게. 

할 수 없이 복학한 후에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 과들을 많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어요. 복학하면서는 디지털 콘텐츠 학과 수업을 주로 들었어요. 근데 디지털 콘텐츠 수업은 보통 툴을 익히는 거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너무 편하더라고요. 생각과 글 쪽을 너무 많이 썼으니까 시간과 기술 쪽도 익히는 느낌으로 밸런스를 맞추면서 남은 학기를 보냈어요.

그때부터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일을 전환해가면서 하는 성향이 있으셨나 봐요.

그렇네요. 지금 얘기해 주시니까 그런 것 같아요.

대학 생활이 일종의 유예이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졸업을 하게 되면 유예 기간이 끝나잖아요. 내가 선택한 전공이 나와 크게 맞지 않는다는 걸 이미 느낀 상태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토익 점수나 대외활동 경력도 없었고, 한 거라고는 풍물 동아리를 2년 정도 열심히 한 거 정도였어요. 그래서 저한테 남은 게 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 학년에 새로운 방향을 만났는데, ‘활’이라는 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없는 취업이 아니라 자기 삶의 디자인입니다’ 이런 말을 하신 걸 보고 거기에 꽂혀서 그분이 진행하는 ‘활 랩(Lab)’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어요. 1년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실험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사람들이랑 만나서 피드백을 주고받는 구조예요.

당시에 진하 님이 ‘삶에게 당하지 않고 삶을 살아내기 위해’ 정한 방향이나 목표는 어떤 거였나요?

방향이나 목표라고 할 만큼 정해놓은 건 없었어요. 저는 철학 강의처럼 받아들였거든요.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어요. 

거기서 여름에 ‘개더링’이라는 걸 했는데 그게 되게 새로웠어요. 제주의 단호박 농장에서 저희가 단호박 캐는 일손 제공을 하고, 그 공간을 빌려서 텐트 치고 생활하면서 네트워킹하는 시간을 보낸 거예요. 

오랜만에 ‘공동체’네요.

저는 십 대를 다 그렇게 보냈으니까 대학교에 와서는 그런 ‘공동체스러운’ 곳에 아예 눈길도 안 줬거든요. 사실 너무 힘들었던 점도 있고. 근데 전혀 다른 거예요. 제가 생각했던 어떤 ‘공동체’라는 게 엄청 작고 특수한 공동체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개더링을 경험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어떤 건가요?

개더링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만났는데 사람들이 각자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꼭 ‘회사원’은 아닌 거예요. 저는 ‘대학 졸업하면 나도 정신 차리고 회사원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도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경험을 한 거죠. 

전체 네트워크 안에서 몇몇이 또 작은 개더링을 진행을 하는데요. 각각 콘셉트도 다르고 느낌도 되게 다르거든요. 다들 뭔가 할 줄 알아요. 또 그걸 나누고, 타투하고, 춤추고, 뭔가 만들고 있는데 ‘나는 그럼 뭘 할 수 있지?’ 하는 고민이 들었어요. 다니면서 나도 나의 어떤 걸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바느질을 시작했어요.

그 안에서 바느질 모임을 진행하며 어떤 걸 느끼셨어요?

제가 인상 깊었던 게 ‘게스트가 아니라 호스트가 돼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보통 우리는 어딘가에 게스트로 가잖아요. 호스트가 돼봐야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그래야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만들어봐야겠다 하고 동대문 가서 실을 15만 원어치 사 왔어요.(웃음) 일단 큰 돈을 썼으니까 뭐든 해야되잖아요. 그렇게 시작했죠.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건 제가 처음부터 ‘바느질 워크숍’이 목적이었던 건 아니에요. 그게 저한테는 되게 중요해요.

실제로 사람들을 모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눠 보는 경험을 해보고자 했던 거군요.

맞아요. 제가 하는 어떤 것들도 다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수단이거든요. 하지만 수단이 있는 건 되게 중요하잖아요. 바느질은 제가 처음 시도했던 수단이었어요. 

진로를 고민할 때 진하 님이 하신 방식대로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만약 내가 열 명의 사람을 모아서 뭔가를 함께 한다면 뭘 할까?’ 그 대답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자 잘할 수 있는 일, 나누고 싶은 일이겠어요. 

그러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사람들과 만나고 싶잖아요. 또 사람들이 반응이 좋으면 그걸 계속하게 되고. 저도 처음에는 무료로 진행하고 대부분 친구들이랑 했는데 계속하다보니 저한테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렇게 하다 보면 또 다른 곳과도 연결이 되겠죠?

최근에 진행하신 워크숍들도 소개해주세요. 굉장히 귀엽고 기발한 기획들이 많던데요. 

그게 하나하나 늘어나는 것도 재미있어요. 우선 다양한 바느질 워크숍을 올해부터 시작했어요. 간단한 수선이나 쉬운 자수 워크숍을 했고요. 빵꾸난 데를 꿰맨다거나 갖고 있던 셔츠에 주머니를 다는 워크숍도 있어요. 옷에다 자수를 놓아서 자기의 이야기를 담는 작업을 많이 했네요. 꼼꼼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인드로 진행해요. 북 바인딩, 그러니까 ‘책 바느질’도 했고요. 앞으로는 그림 워크숍이나 매듭 워크숍도 열어보고 싶어요.

그런 프로젝트들 안에 녹여내고 싶은 가치나 의제가 있으시다면요?

환경이나 생태 같은 가치도 있고요. 생활 기술이라고 말하면 딱딱하지만 작은 기술을 익히는 게 자기한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 최소한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자기효능감이 생기고요. 기술을 익히면서 저는 제 자신이 단단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풍물이나 퍼커션을 했던 것도, 다들 잼(즉흥 연주)하고 신나게 노는데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랑 그 자리에서 북이라도 두드릴 수 있는 거랑은 다르니까요. 

명확한 구분은 할 수 없겠지만, 일과 삶을 어떤 식으로 구분하시는지도 궁금해요.

근데 저에게는 일과 삶이라기보다 ’같이 하냐 혼자 하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뭐든 다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컸거든요. 일기도 같이 쓰고 싶고 그림도 같이 그리고 싶고 바느질도 같이 하고 싶고. 근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혼자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깊이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같이 하고 싶은 것을 잘 하려면 혼자 하는 시간도 무조건 필요한 것 같아요. 혼자 하는 시간이 있어야 같이 하는 시간을 잘 준비할 수 있더라고요. 

재미있는 구분이네요. 한편 수익이나 생계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그게 정말 고민인데… 일단 올해는 시작 단계니까 돈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꾸 ‘내가 이만큼 재료를 샀는데’ ‘내가 여기까지 멀리 왔는데’ 하면서 손익을 따지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돈 공부를 계속하고 있어요. 저는 부자 되는 게 목표거든요.

부자가 되고 싶다니, 의외의 답변이에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죠. 근데 남들보다 경제적 자유의 기준이 더 낮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패시브인컴이 월 100만원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죠. 

그래서 계속 돈 공부를 해요. 그러면서 또 어떻게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지? 정말 덜 벌고 덜 쓰면서 사는 친구들이 있는데 걔네들은 어떻게 살지? 근데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싶지? 저는 뭔가 배우고 싶을 때 배울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 좋겠거든요. 그래서 돈 얘기를 할 친구들을 찾고 싶어요. 

사실 성장 과정에서는 대안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돈보다는 가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고. 저는 상업과 비상업, 자본주의와 대안경제까지 범위를 넓히고 제가 직접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어요.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말과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자는 말은 다르니까요.

다양한 세계를 건너 다니셨고 때마다 어떤 충격이나 혼란도 겪으셨을 텐데, 그게 또 진하 님의 힘일 것 같아요.

저는 계속 새로운 거에 관심이 가서 어려웠거든요. 한 가지를 깊게 파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왜 하나를 못 하지?’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런데 결국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걸 일단 알았고, 이런 성향에서 오는 장점도 분명 있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됐어요.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있겠지’ 싶어요. 그게 올해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새로운 모험이 시작됐네요. 마지막으로 ‘모험가 장진하’의 지금은 모험의 어떤 시기일까요?

평생 모험을 할 것 같긴 한데요. 지금은 열심히 싸돌아다니는 시기겠죠?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리는 시기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