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년대 후반, 내가 방송원고를 써서 밥벌이를 하던 무렵, 독일 유학 중에 잠시 귀국한 시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시인은 어두운 음식점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내게는 무엇이 있나를 생각하던 밤이었다.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가난을 익숙한 옷처럼 걸치고 지내는 힘든 유학 생활에서 시인을 붙들어 준 것이 ‘시’라면, 내게는 그런 것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서른 해 가까이 타지에서 살면서도 끝없이 모국어로 된 작품을 발표하던 시인은 몹쓸 병을 얻어 결국 뮌스터의 숲에 뿌려졌다. 그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강의 저녁노을과 중앙시장의 국밥을 더는 가까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허수경 시인이 나고 자란 진주의 진주문고에는 시인의 책만 따로 모아 꾸민 코너가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이렇게 지상에 없는 시인을 기억하고, 그가 평생 도달하려고 했던 정주지(定住地)인 시만 남아 우리를 불러 모은다.

안녕하세요. 제가 또 <너머의너머>에 글을 보내게 될 줄 몰랐는데요, 다시 부탁을 해주셔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너머의너머>에서 보내주는 메일들을 소중히 잘 읽고 있어요. <너머의너머> 인스타그램에 ‘이번 달의 얼굴들!’ 예고가 뜨면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 한 달에 놀라요. 그 시간 동안 저처럼 정신없이 살아갔을 다른 간디학교 사람들의 얼굴들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덕분에 평소 잘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툭툭 메시지를 보내보기도 해요.

메일을 받으면 보통 집에 돌아와 말끔히 씻은 후 보송하고 개운한 상태로 이불에 누워 메일을 읽기 시작하는데, 매달 새로운 얼굴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재밌어요. 글들에는 제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등장하잖아요. 그런데도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사람의 얘기가 더 재밌게 읽혀서 신기해요. 이런 세계도 있구나 싶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기도 하고, 이 글쓴이들 중 나만큼 운영진을 곤란하게 했던사람이 있을까나-하면서 속으로 큭큭 웃으며 보기도 해요. 

제가 첫 글을 쓰기 어려웠던 이유에 대해서 그 이후로도 계속 생각해봤어요. 지금 보면 그 당시 저는 긴장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것 같아요. 물론 원래 저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고, 지금도 얼굴 모르는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에 제글이 놓인다는 것이 긴장되긴 하지만요, 그것 말고도 ‘어떻게든 지금 상태를 잘 정리해야지!’ ‘명확한 단어로 나를 설명할 줄 알아야지!’ ‘괜찮아 보여야지!’하면서 힘을 너무 주고 있었나 봐요. 졸업을 하고도 학교를 생각하면 여전히 혼란스럽고, 그동안의 세계와 똑 떨어져 버린 현재의 나는 너무 불안정하고.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항상 노심초사한 상태였어요. 그런 저를 나은이 달래주시면서 겨우겨우 글을 썼잖아요. 그렇게 글이 <너머의너머> 1호에 실렸는데, 메일이 발송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친구에게 소감을 물으니 “그냥 뭐, 강당 복도에 있는 학교 소식지 있잖아, 그거 읽는 것 같아서 재밌었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빵빵한 풍선이 픽 하고 쪼그라드는 것처럼 힘이 픽 빠지더라고요. 그렇지, 그거랑 별로 다를 것이 없겠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도 크게 다르지도 않고 다를 수도 없는데. 그냥 지금의 나를 툭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읽었겠다 생각하니 긴장했던 몸이 조금 부드러워졌어요.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도 있고요.

그러다보니 <너머의너머>에 괜히 더 고마운 감정과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매달 이곳에 글을 보내는 사람들도, 글을읽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겠죠? 졸업 후에도 마음속에 쌓여있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사람들, 자신의 안부를 전달하고 싶은 사람들, 다른 이의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 이어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로 그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어 감사해요. 사실 꽤 많은 졸업생이 그런 장이 필요하다곤 생각했을 것 같은데, 더 이상 간디학교가 자신의 본거지가 아니게 되면 학교와 관련된 일들을 벌이고 책임지고 진행하는 것은 어렵잖아요. 지금 <너머의너머>가 저희를 대신해 그것들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고 많이 감사한 마음이랍니다. 

저는 항상 강당 벽에 소식지가 붙으면 급식실에서 밥을 다 먹고 사과를 두 알 챙겨 냠냠 먹으면서 소식지를 읽었는데요, 그 시간을 떠올리며 <너머의너머>를 읽고 있어요.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가 들려올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또시간이 지나면서 <너머의너머>가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가 됩니다. 반년 동안 달려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시 전 독자의 자리에서 <너머의너머>에 응원을 전하도록 할게요. 

작년 초여름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니 나무 밑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아빠~” 하고 부릅니다. 고3 딸인 들입니다.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일텐데.... 또 땡땡이냐? 수업 끝났는데요! 그럴 리가.... 노래 한 곡을 청합니다. 여유의 <생각은 자유>라는 노래를 불러줍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사방은 푸르고, 몇몇 학생들은 나른하게 여기저기에 있고, 기타 소리는 부드러우면서 상쾌합니다. 아, 잠깐 천국을 경험하였습니다. 

저는 간디학교를 좋아합니다. 학교의 풍경이 아름답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다 예쁘고, 선생님들도 친절하고 푸근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이 뿐만 아니라 저도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첫째 산이와 둘째 들이가 모두 졸업하고 나면 이제 학교에 갈 일이 없어지겠지요. 슬퍼집니다. 막내 강이를 불렀습니다. “강아, 나는 간디학교가 넘 좋은데, 우째 안되겠나?” “그까이꺼 마 함 해보입시더” 고맙게도 훌러덩하고 붙었습니다. 좋아하는 학교에 갈 이유가 생겼고, 새 친구를 사귈 기회도 얻었습니다. 간디학교 학부모의 즐거움이 3년 연장되었습니다. 

“산이 아빠, 간디도 이제 졸업기수가 20회가 넘었는데 졸업생들이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동문 명부 이런 거라도 있어야 안 되겠나?” 21기 민이 아빠의 제안이었습니다. 그 때가 2018년이었습니다. 의견은 충분히 나누었지만 실행은 쉽지 않았습니다. 차일파일 미루다 코로나 시대가 되었고, 학부모의 모임이 어려워져서 시들해졌습니다. 학부모로서 할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근데 이게 기회였습니다. 할 일도 없는데 이거 한번 해볼까? 22기 영초 아빠와 윤하 아빠, 그리고 성욱이 아빠가 뒤에서 밀어주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 취지를 말하니 졸업생이자 간디학교 선생님이신 ‘안군’을 소개해줘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안군은  졸업생인 나은 선생님과 뼛속 간디인인 병훈 선생님을 실무자로 추천하였습니다.

두 분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백서보다 지속적으로 졸업생의 근황을 알 수 있는 뉴스레터의 형식을 제안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탁월한 선택입니다. 몇 개월의 준비를 거쳐 작년 10월 말에 1호가 나왔습니다. 아, 너무 좋아서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그렇게 간디학교 졸업생 뉴스레터가 탄생했습니다. <너머의너머>는 실무자인 나은, 병훈 선생님과 도움을 주신 안군 선생님, 그리고 격려하고 후원한 간디학교 22기, 23기, 24기 학부모님, 그리고 필진인 간디 졸업생 등 간디인이 만든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다들 잘 지내?’ <너머의너머> 1호의 첫 문장입니다. 매달 말일 <너머의너머>는 나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렇게 즐겁다고, 이렇게 힘들다고, 이렇게 재미나게 산다고, 이렇게 재미 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고 안부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간디를 졸업한 산이 들이의 이야기이고, 또 졸업할 강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갈피를 못 잡고 사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간디 학부모를 졸업해도 많이 슬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안부를 물어오는 이가 있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