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나은과 함께 <너머의너머>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윤병훈이라고 합니다. <너머의너머>를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 저를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습니다만, 저는 간디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저는 스무살 여름에 간디고등학교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여름에 계절학교 자원교사로서 처음으로 간디고등학교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친구 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만 그때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14기(가 될) 학생들과 선녀탕에도 가고, 보디가드 피구를 하고, 매일 수박을 먹고, 온갖 종류의 놀이를 하고서는 강당 한귀퉁이에 있었던 지름이 양팔 너비만한 선풍기 앞에 서서 옷소매를 펄럭이던 오박 육일이었습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그 오박 육일 사이에 야구선수 양준혁이 은퇴를 했었습니다. 저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경기를 보러 가본 적도 없는 대전 출신이었는데, (그때도 한화는 야구를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박 육일을 정신없이 놀고 원지 터미널에서 탄 서울행 고속버스에서 양준혁이 은퇴했다는 뉴스를 보았던 것이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지금도 야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그 이상한 기억은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아직 없던 12년 전의 여름에 신안면 외송리에서 가능했던 단절과 즐거움의 징표 같은 것으로 기껍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양준혁의 은퇴 소식을 접한 서울행 고속버스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저는 그 여름 이후 12년 동안 간디고등학교 주변을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해서 맴돌았습니다. 이런 표현도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12년차 간디고등학교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끈기있고 질척이는 타입의... 그 12년 동안 저는 바로 다음 해면 간디고등학교에 입학해 ‘간디사람’이 될 중학생들을 앞에 두고 학교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양 고래집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던 계절학교 캠프의 스태프였다가, 술에 취해 떠들썩한 졸업생 친구들 옆에 앉아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을 수놓은 사건들에 대해 잠자코 들으며 꾸벅꾸벅 조는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가, 그 친구들과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보다 다른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쯤에는 매주 서울과 산청을 오가며 간디고등학교 식당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평상에 앉아 저보다 열 살쯤 어린 재학생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으면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씩, 여러 곳에서 여러 일을 하며 살아가는 간디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며칠 먼저 읽거나 듣고서 <너머의너머>로 만들어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보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우스운 일이지만 저는 간디고등학교에 대해 논문을 쓰면서야 비로소 제가 간디고등학교의 졸업생이 아니기 때문에 간디고등학교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저의 이해가 어쩔 수 없이 경솔하게 매끄럽고 간편하게 낭만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혹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모으고 자세하게 설명해보려고 해도 외부인이 끝내 다가설 수 없는 거리가 있고, 아무리 내밀한 즐거움과 비밀들을 공유하더라도 너무나 결정적인 순간에 안락하게 비켜서있을 수 있는 자리가 외부인에게 허락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제가 <너머의너머>를 시작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마땅히 설명해야하는 이 글을 쓰는 것은 저에게 결코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허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실 분들 중 대부분은 간디고등학교의 졸업생이시거나, 학부모이시거나, 교사이시거나, 재학생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여기까지 생각을 하니 이것은 참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이 주째 쓰고 있고, 이미 나은과 약속한 마감을 훌쩍 넘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12년차 외부인으로서의 저의 이유에 대해 제가 이해하고 있는대로 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앞에 놓인 허들을 어물쩡 돌아 지나치거나 어이쿠야 거기 허들이 있는 줄 몰랐네 하고 혼잣말하면서 허들을 넘어뜨리고 지나가버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하하!

돌이켜보면 저는 간디고등학교를 통해 만난 저의 졸업생 친구들에게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발견했었고, 이십대의 거의 대부분을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그 아름다움 같은 것에 스스로를 비춰보고 그 앞에서 이런 저런 나름의 포즈를 취해보며 지금의 제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움 같은 것과의 최초의 조우 때로부터 한동안 저는, 지금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에 강하게 매혹되어서, 그것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라면 마다하는 일이 없었고 그것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어디든 따라 쏘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저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 마음 이곳 저곳을 들춰보곤 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저를 매혹시켰던 그 아름다움 같은 것이 다만 빛나는 아름다움 뿐만이었던 것은 아니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듯 그것을 흉내내어보던 저의 경우와는 달리) 그 이면에 불안과 약간의 안간힘, 혹은 절박함 같은 것이 기대어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포즈 이야기를 했으니 말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름다움 같은 것을 포즈로 바꾸어 말한다면 그건 까치발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지금의 제가 이해하고 있기로, 그런 까치발이란 무언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나름대로 자신도 있지만 그만큼 불안하고 또 간절할 때, 그런 노력과 불안을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동시에 쉽게 들키고 싶지 않을 때, 때로 그냥 나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우겨보기라도 하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자세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는 그 까치발 같은 것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자세하게 말해보고 싶어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제 친구들의 이야기를 거꾸로 따라가 간디고등학교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무살의 제가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제 앞에 마주 앉아 주었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재학생들에게서 발견할 때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너머의너머>를 시작해보자는 감사한 제안을 받게 되었을 때, 저는 그 감정들에 대해 논문에서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제가 발견했다고 생각한 그 까치발의 주인들에게 (물론 제가 <너머의너머>에 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그 제안을 수락했던 것 같습니다.

내내 아름다우시기를, 하지만 혹여나 그 아름다움이 흐트러질까 하는 두려움에 너무 힘들게 까치발을 들다가 지치지 않으시기를, 그리고 그럴 때 혼자 외롭지 않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때 말을 건네고 서로에게서 나름의 화답을 들을 수 있는 비상연락망 같은 것을 가지실 수 있기를, <너머의너머>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신경질적이고 때로 무감하며 대학원 생활을 통해 체화한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저의 졸업생 친구들이라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글을 일종의 헌사라고 생각하고 쓰고 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신 간디고등학교의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께, 같이 이 일을 시작했지만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하는 나은에게, 그리고 아껴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너머의너머>가 앞으로도, 얼마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은과 저의 손을 떠난 뒤에도, 호를 거듭하며 계속될 수 있도록 많이 좋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동안 생각해보았는데 제가 <너머의너머>를 시작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들은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이야기는 이런 대사로 시작해. 

나쁜 생각이 들어서 당신을 보러 왔어요.

지난겨울 나에게는 세 가지의 중요한 편지가 있었어. 각각 다른 발행 주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잘 보내야 하는 편지라는 점에서는 같았지. 첫 번째는 내가 일하고 있던 사회적 기업이 홍보를 위해 격주로 발행하던 뉴스레터였어. 주요 목적은 기부 및 후원 독려. 곰 얼굴을 한 마스코트가 있었는데, 목요일이나 금요일이 되면 나는 곰이 되어 편지를 썼어. 종종 협업을 진행한 다른 기업의 소식도 실어야 했어. ‘마음까지 촉촉해지는 OO로션’처럼 기업들의 따뜻함을 보여주는 것이 포인트였지. 사업명이나 기부금액 같은 것을 절대 틀리지 않게 주의하며 편지를 써서 매달 조그만 돈을 벌었어. 

두 번째는 그때 내가 홀라당 반해버린 누군가에게 쓴 편지였어. 두 번째 편지를 쓴 건 겨울 동안 딱 한 번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편지였지.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편지를 주고 싶었어. 너도 알겠지만, 먼저 반해버린 사람은 필연적으로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잖아. 펜을 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도 좋은 말들이 떠오르지가 않아서 네가 나에게 써준 편지들을 다시 꺼내봤어. 내가 다정을, 위로를, 사랑을 배운 편지들을.

세 번째는 ‘너머의너머’야. 간디고등학교 졸업생 뉴스레터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었어. 인터뷰이와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를 다듬고, 필요한 이미지를 디자인하고, 첫머리에 들어갈 에디터의 말을 쓴 후 이것들을 엮고 보내는 일을 매달 하고 있어. 손 편지를 부치는 일처럼 이야기했지만 보통은 늦은 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편집 작업을 해. 생각보다 업무량이 만만치 않아. 매달 30일을 발행일로 정해놓고는 거의 30일 자정 직전에 발송 버튼을 누르곤 해. 마감은 어찌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돈을 벌고 끼니를 챙기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30일이 코앞이지. 때로는 ‘너머의너머’로 갈피를 꽂게 돼. 어떤 달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휴대폰 메모장에 에디터의 말을 썼어. 어떤 달에는 훌쩍 떠난 강원도 바닷가 카페에 앉아 에디터의 말을 썼어. 어떤 달은 새벽녘 침대에서 곤히 잠든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누르며 에디터의 말을 썼어. 때로 너도 ‘너머의너머’로 시간의 흐름을 실감할까 궁금해. 

기억해? 우리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너를 앉혀놓고 자주 푸념했잖아. 인간 수명이 딱 이십 년이면 좋겠다고. 어째서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도 삶이 계속되는 거냐고. 지나가는 모든 것에 시비를 걸던 나를 너는 말리지 않았지. 배부른 소리말라고 혼내지도 않았고. 내가 아악-하면 그쪽에서도 아악-. 누구보다 찰떡같이 맞장구를 쳐줬을 거야. 우리는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졸업식을 치른 스무 살이었으니까.

어느 날 우리는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서 울어. 기타 코드도 알고 가사도 다 외우는 노래를 같이 부를 사람이 없어서.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플라스틱 컵에 테이크아웃 해서. 우리가 좋아하던 어른의 한심하고 추한 얼굴을 목격해버려서. 세상에 그림 잘 그리고 글 잘 쓰는 애들이 넘쳐서.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돌아다녀도 가진 돈으로는 자취방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파티에서 막 쫓겨난 손님처럼 울어.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종종 만나. 고등학생 시절 사이 좋게 포동했던 우리는 조금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어. 너는 얘기해. 파스타를 서빙하고 공사장 벽돌을 나르고 배달의민족이라는 글자가 적힌 가방을 메고 언덕을 오르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어쩌면 그게 시위대 맨 앞줄에서 몸싸움을 하는 일보다 어려운 것 같다고. 그걸 어렵다고 느끼는 스스로의 유난스러움이 싫다고. 

몇 숟갈 남은 음식을 앞에 두고 내가 말해.

미안한데 나 요새 위가 너무 아파. 남겨도 돼? 

너는 내게 대답해.

응. 지구보다 네 위장이 더 소중해.

어느 날에는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아. 나는 서운해지지 않으려고 편지 상자를 열어봐. 오래전에는 240mm 짜리 컨버스가 들어 있던 상자야. 거기에는 열일곱 살부터 받은 편지가 가득해. 기숙사 책상에 과자와 함께 놓여 있던 쪽지(그때 우리에게 과자가 얼마나 귀했는지!). 이면지 뒷장에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내 얼굴(3초 만에 내 이목구비를 그려내던 걔의 솜씨를 기억해?). 봉투가 두툼할 만큼 빼곡히 채운 이야기(매일 붙어 다니는 데도 펜을 들면 할 말이 또 있었나 봐.). 각기 다른 글씨체로 적힌 내 이름.(나은아. 나으닝. 나은이에게. To 윤베럴. 싸랑하는 나은에게…) 나는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혼자 웃어. 하지만 어떤 편지는 무슨 내용인지 다 알아서,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넣어 놔. 무언가가 끝나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그리고 네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잠들어. 

이런 것치고는 그렇지는 않아서, 내가 간디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 졸업생은 아니라는 걸 너는 알지. 스물여덟 살이 된 나는 이제 그 상자를 잘 열어보지 않아. 우리가 이제 옛날 얘기를 잘 하지 않듯이. 그리고 그 사실이 다행스러워.

그렇지만 모두에게 나쁜 생각이 들 때 보러 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 있기를.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밤에는 꺼내볼 수 있는 편지가 한 통쯤 있기를 바라. 

그게 전부야. 

우리는 그때 모르는 것이 많았고 지금 새롭게 사랑하게 된 것이 많지. 

우리가 보내는 편지가 더 이상 서로를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다만 한 통의 좋은 편지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오래 전 네가 써줬던 편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