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서의 나를 떠올려보자면, 상당히.. 성가신 학생이었을 것 같다. 몇 가지 기억나는 일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일화는 빽샘이 영어 선생님이었던 줄 모르고 ‘만두가 영어로 뭔 줄 아세요? 모르죠? 그럴 만두 하지~’하는 부끄러운 개그를 친 일도 아니고, 호섭샘이 삶과 철학 시간에 14기 정말 착하다고, 나는 다예가 왕따라도 당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함께 잘 어울려서 다행이라고 말한 일도 아니다. (감사합니다 샘. 덕분에 친구들이 그 얘기를 10년 넘게 우려먹고 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을 맞이했을 때였다. 3월이었고, 저녁을 먹기 전 해가 지는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바빠지기 시작했고, 나는 난로와 커피냄새가 옅게 나는 교무실에서 안군과 손으로 젓가락 놀이를 하고,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었다. 안군은 나무바닥에서 종이를 꾹꾹 누르며 비행기를 접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가방을 벗어보라고 했다. 가방을 벗으니 외투를 벗으라고 했고, 외투를 벗으니 밖에 나가보라고 했다. 아직 비행기 다 못 접었는데, 하며 밖으로 나갔더니 외송리의 차가운 바람이 무섭게 불고 있었다.

내가 “샘, 너무 추워요!” 라고 말하자 안군은 “이게 졸업이다. 젓가락 놀이하고, 비행기 접으며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말했다.

안군의 말은 졸업 후에도 오은영 박사의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라는 유명한 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이게 과제다. 젓가락 놀이하고, 비행기를 접으며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취업이다. 젓가락 놀이하고…’, ‘이게 사회생활이다. 젓가락…’ 

영원히 간디학교에 있고 싶었지만,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졸업을 하고 보니 대안이니 혁명이니 다른 삶이니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이 둘을 대안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했고 우리 집 사정에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단 것을, 고등학생 때야 어렴풋이 알아도 됐었지만, 스무 살이 된 성인이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처럼 나에게도 ‘나의 산수’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 ‘부모님의 산수’를 목격했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어디서든 특별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졸업하고 나니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졌다. 얼른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어서 나를 책임져야 했다. 쉽게 알 수 없는 이름의 대학에서도 돈이 아까워서 공부했다. 교무실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었던 내가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조기졸업으로 학위를 취득해서 많은 어른이 말하는 ‘좋은 직장’에 입사했다. 월급으로 학자금을 상환하고, 일부를 부모님의 생활비에 보탰다. 삶이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영원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습관처럼 어떤 일을 하고, 무언가를 소비하고, 누군가를 욕하고, 주말에는 출근하기가 싫어 늦은 시간까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런 것들이 도무지 재미가 없다가도 죄책감 없이 보낼 수 있는 주말이, 한 달마다 입금되는 월급이 달콤하고 유용했다. 학생일 때는 어떤 시스템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상황이 바뀌곤 했는데, 성인이 되니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월요일과 똑같은 화요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 주와 같은 이번 주가, 저번 달과 같은 이번 달이. 나는 내가 바라던 어른과는 아주 멀어져 있었다. 

뭐 이런저런 삶이 있겠지만, 그런 삶이 나의 삶에 대한 해답은 아니었다. 언젠가 친구가 전해준 문장을 떠올렸다. 삶이 이것뿐이어서는 안되어서 시를 썼다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나에게도 삶이 그것뿐이어서는 안되었다. 스물 다섯 무렵부터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전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많은 어른들이 말하는 좋은 회사에 갔는데 나는 아니었어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서.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는 책을 읽고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을 쓰면서 이제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도 될 나에게 솔직해져 보았다. 그 무렵 부산의 한 대안공동체에서 주관한 교육 프로그램에서 간디 때와 비슷한 배움을 받았던 게 또 도움이 됐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직장인일 때도, 직장인이 아닐 때도 삶에서 빼놓지 않고 중요하게 여겼던 단 하나의 가치는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삶’이었다. 결국 나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소비하고, 관계하며 살아야 한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소비하고, 어떤 사람들과 관계하는가’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는 당위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법에 대한 문제였다.

스물다섯의 여름,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젊음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내가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할까 라는 고민의 결과물과,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산한살림'의 실무자가 되었다. 조합원의 정보를 관리하고 관련 내용을 보고하는 업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합원의 전화를 받아 물품 주문을 돕거나 클레임을 처리하는 업무였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진심을 담아 질문하고 결론 내린 일이라 전보다는 내 일상에 조금 더 감사할 수 있었다.

한살림의 실무자로서 맞이한 스물일곱의 봄에,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 열이 나고 배가 쑤셨다. 코로나가 막 창궐한 시기라 불안했지만 내가 사무실에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다.(왜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지 않은가.) 여섯 시 땡 하자마자 퇴근해서 근처의 내과로 달려가 열을 쟀더니 38도가 넘었고, 왜 이제야 왔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의사가 배 이곳저곳을 찔러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맹장염인 것 같으니 어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당황한 내가 ‘저는… 똥을 못 싸서 똥독이 오른 건줄 알았는데요…’라고 말하자 크게 한숨을 쉬더니 소견서를 써줄 테니 지금 당장 가라고 했다. 큰 병원으로 가면서도 ‘맹장이 아픈데 이렇게 지하철을 타고 다닐 수 있나?’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제일 가까운 종합병원에 도착하니 진료 시간이 끝나서 응급실로 가야 했다. 링거를 맞은 채 병원 천장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왜 스물일곱에도 몸이 얼마나 아픈지를 모르는 걸까, 그냥 아프다고 하고 반차낼걸, 코로나면 어쩌지, 사무실을 닫으면 그 손실이 얼마지, 응급실 비용 얼마지… 하는 생각에 눈물 흘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의사가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왜 우느냐고, 무서우냐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부터 무슨 검사를 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만난 의사들 중 가장 친절한 그 분을 보면서 사람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타인을 안심시켜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마친 후 맹장은 허무맹랑한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염증 수치가 많이 높아 열이 나고 통증을 느꼈을 것이며 약을 복용하고 푹 쉬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열이 깨끗하게 내린 후 병원을 나서자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지구는 돌고, 해는 뜨고 지며, 풀은 자라고, 어제와는 다른 바람이 분다. 누군가는 운전을 하고, 누군가는 접수를 받고, 누군가는 물건을 나르고, 누군가는 병을 고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일일 것이고, 이런 세상 속에서 나는 또 하루를 살아가고 어딘가로 나아간다. 하루 동안 배를 찌르는 돌팔이와 눈물을 닦아주는 명의를 만났다. 그러니까, 한살림이 문제가 아니었다. 돌팔이도 명의도 모두 세상을 일구는 하나의 생명이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한살림이라는 가치를 위해 노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향하는 가치 속에서도 나라는 생명이 어떤 일을 더 잘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삶을 마주하며 떠오르는 질문에 진심을 다해 고민하고 답변할 수 있는 힘은 모두 간디학교에서 배웠다. 이 글을 읽을 당신에게서 배웠다. 그것이 나에게는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실은 언제나 이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는 테크닉이 되었다. 그래서 또 한 발자국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스물여덟에 한살림을 퇴사한 후에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노력을 했다. 막 스물아홉을 맞이한 1월, 준비했던 공부를 모두 마치고 서울에서 간디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는 내게 <너머의너머>에 실을 글을 써달라고 했고, 그런 건 멋진 사람들만 쓰는 거 아니냐며 손사레 치자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계속 설명해주었다. 간디 친구들을 만난 후 내가 있을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서 항상 권나무나 이랑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던 나는, 이제는 슬픔보다 피곤함이 커져 울기 전에 잠들어버리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교무실에서 젓가락 놀이를 하고 종이비행기를 접었던 내가 조금씩 씩씩해지고 있다. 나의 수많은 처음을 함께해준 당신 덕분이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밥을 먹고 싱크대 앞에 서서

스크롤을 내린다

날이 갈수록 거실에 서서 시만간 버리고

거북목이 일거지는 중이다. 말 그래도 말야.

요즘 무심결에 한 어절의 두 자음을 거꾸로 쓴다.

정신머리는 애들이 내 이름을 가사에 넣어 불러주던 생일날에 두고 왔다

나는 늙어서 그렇다고 말해본 적 없다. 

열심히 살거든. 갈수록 총명하고 건강하지만

아침엔 마약처럼 홀가분하고

저녁엔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다

바뀐 사람들, 애인이랑 사 년 째 사귄다는 동창

벌써 사 년이 지났나? 

사 년뿐인가 햇수로 십 년은 넘었을 그 사람들이 없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서 기다리고

어린이 대공원

규범을 지킨다. 얌전히 서서 사라진 일행을 기다리면

방송은 나를 찾을 것이다

어른의 대공원 법이 바뀌고 산재근로자 연대 투쟁

전자 서명을 하고, 벌써 사람 몇 사라진 기계들에

거북목이 지렁이처럼 빨려들어가다 솜사탕 냄새에 깬다. 

나를 찾는 사람들을 찾아야지.

아직 날은 밝고, 사람들이 쥐어준 용돈도 아직 한움큼 있다.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연극 같은 말은 재미있다

껴안는 상상을 하면 시간이 금방 간다

그사이 투쟁하는 사람에게도 방송이 온다

나는 이 싱크대 앞에서 데려가질 않는다

베란다에서 누가 부르고 

돌아보면 금새 도시 식 이름을 붙여준다

새 사람들이 도시의 소문을 들려주면 나는 동전을 한닢씩 준다

어디서 많이 본 인상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다

가족이 되고

있었어야 할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데리고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길 잃으면 

분명 여기에 있기로 했거든

다시 안기는 상상

한사람은 시원하고 한사람은 뜨거운

뺨에 볼을 맞대는 상상을 하면 시간이 금방 간다

￣

날의 찬가

수련회를 가는 마지막 나이였다

밤에 양치 시간이 되고

수건 사이에 싸 온 면도기를 꺼냈을 때 여자아이들은

다시는 볼 수 없을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 와 너 면도해?

다른 성별에 대한 호기심이나

2차 성징 교육에서 말로만 듣던, 남자는 수염 난다는 사실을

눈 앞의 애한테 직접 보아서 신기했을까?

어른 취급에 마음 으쓱했지만

쉐이빙폼 한 통을 다 쓴 날

여지껏 듣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거꾸로 쥐고 피부를 잡아늘인 채 턱을 긁어올릴 때 드드드득

찬 쇠가 

살에 직각으로

결을 헤치며

짓누르며 거슬러오르는

피흐르지 않고

그러나 베는

칼이 아닌

날의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난

그 아이들, 내가 아니라 면도기를 보며 말했음을 기억해냈다

(모든 기억은 현재라는데)

- 와 너 이제

얼굴에 날을 대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얼굴에만 대겠니. 칼갈이집에 맡긴 식도를 찾아올 때마다

날을 수직으로 세워서, 온 몸 비질하듯 쓸어 보는데

자. 칼과 날이 뭐가 다른지 봐라. 

보라고.

내가 쥔 것은 칼이 아니라 날이라는 통제감

칼은 토막내는 것이지만

날은 깎아내되 베지 않는 것

그 끝을 딛고 일어설 수조차 있는 것

날 - 덮쳐오는 유리 더미에 뻗으면 

만화처럼 박살낼 것 같은 전능감

그러나 더 소설처럼, 교과서에 나온 헛소리 같은 절차대로

번쩍이는 춤

관혼상제의 춤 물음이 여쭘이 되고 우려가 진실이 되고 안부가 망각이 되는

무언가 경동맥 옆 5센티를 날아다니는 삶

미군이 보병을 일컫는 말 '소프트 타겟'

그 시뻘건 유부주머니에 대고 누르면 당첨된 자비처럼

날 - 깎아내며 미끌려 비켜주는데 

승객에게 조금씩 매연 먹이는 디젤엔진 진동처럼

매 연말 더 슬퍼지는 혀 끝 샴페인 기포처럼

날 - 긁어 올리며 무어라 골에 울려퍼지고 

미역처럼 자라는 사슬의 시간

쉐이빙 폼이 도랑 풀섶처럼 푸석이고

나는 칼잡이가 아니라 날잡이야, 날잡이라는 말이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몸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계란 같은 내 턱을 움켜쥐곤 그아이 말하지

네가 칼에 재주껏 비껴서고

날이 네게 왜인지 미끄러질 때

네가 그것과 맞물린 톱니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니

아무것도 너를 부수지 못했다면, 네가 무언가를 부수고 있는 거야

뚫어내고 있는 이 광맥의 파동이 느껴지느냐고

기영이라는 연결, 연결이라는 공연 (1)

반갑습니다.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어떤 종류의 자기소개를 해야하죠?(웃음) 저는 공연 예술을 하고 있는 김기영이라고 하고요. 최근에는 주로 ‘소리 내고 움직이고 그리고 공연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저를 소개하는 것 같아요.

‘소리 내고 움직이고 공연 만드는 일’ 세 가지를 말해주셨는데, 하나하나씩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각각이 하나하나일 수도 있고, 이거 전체가 하나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간디학교 졸업하고 전통 연희를 전공했거든요. 근데 ‘연희’라는 것 자체가 춤이랑 노래랑 악기 연주가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는 분야예요. 그러다 보니 그걸 제 몸에서 연결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됐고요. 그리고 제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질문들을 파고들면서 공연을 계속 만드는… 그러니까 해야 되는 공연을 한다기보다는 공연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이렇게 소개를 했고요. 

또 ‘소리 내고 움직이고’라고 말한 건, ‘춤’ ‘노래’라고 말하기보다는 더 근본적인 용어로 말한 게, 연희를 전공한 이후에 제가 몸에 대한 탐구라든지 움직임 자체에 훨씬 관심이 많아졌어요. 즉흥 작업이나 훈련도 많이 했고요. 사실 소리나 움직임은 늘 있는 거고, 그 속에서 또 저는 뭔가를 만들고, 만든다는 말도 이제는 조금 어색한데요. 만든다기보다는 뭔가 생성되는 걸 보고, 그걸 그대로 두고, 그런 작업을 점점 하는 것 같아요.

‘전통 연희’는 비교적 생소한 분야인데요. 그걸 전공하겠다고 결정을 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장구나 꽹과리는 열 살 때부터 했어요. 당시에 저는 그냥 집에서 가까운 일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연히 학교에 사물놀이부가 생겼어요.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사물놀이에 되게 열정이 있어서 동아리를 열심히 꾸리셨거든요. 그 여파로 저희가 운동회 같은 때도 열심히 공연하고. 그리고 제가 다닌 중학교도 동아리가 되게 활성화된 곳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중3까지 거의 한 번도 쉬지 않고 악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늘 있었어요. 방학 때 다른 지역에 가서 연수를 받기도 했고요.

어릴 때부터 ‘이거 되게 재밌다’하는 느낌이 있으셨나봐요.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건 아니고 딱 보고 재밌어보여서 제가 엄마를 막 졸라서 한 거였어요. 저한테는 되게 좋은 취미였죠. 중학생 때도 주변에서 너 잘하니까 전공해보라고 막 그랬는데 나는 끝까지 취미로 할 거라고 했어요. 

간디학교 입학 전까지는 전공으로 할 생각은 없으셨던 건가요?

맞아요. 사실 전공으로 한다면 예고를 선택할 수도 있잖아요. 고등학교를 선택하기 전에 엄마랑 같이 어떤 학교를 갈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다가 제가 중학교를 일반 여중에서 다니면서 ‘와, 나는 여기서는 절대 살 수가 없겠다’ 싶어서 대안학교를 가야겠다 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진로에 관해서는 완전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일단 간디학교를 갔어요. 

간디에도 물론 ‘솔뫼바람’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제가 예전에 했던 거에 비해서는 풍물이나 사물놀이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열악했어요. 간디 입학하고 나서는 살짝 연희에서 멀어지는 듯 한 느낌, ‘여기서 내가 취미 생활을 계속 즐길 수는 없겠군’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솔뫼바람’은 소위 가장 ‘빡센’ 동아리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기영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나봐요.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제가 예전에 가던 사물놀이 교육원도 막 찾아가고. 방학 때는 일주일 내내 가서 연주하고 그랬어요. 근데 내가 계속 가니까 거기 있는 선생님들도 ‘너 이거 전공 안 할 거면 가서 공부해야지, 왜 자꾸 와’ 이런 분위기인 거예요. 한국이 그렇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취미로 해도 되는데, ‘전공을 해야지만 이걸 계속 할 수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문화가 있었죠. 그럼 나는 이제 다른 나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가 연희를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하신 계기는 어떤 건가요?

제가 늘 가던 곳이 있었는데, 이제 내가 전공을 하지 않을 것이니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놀러 가는 마음으로 가야겠다, 하면서 고1 여름방학 때 딱 거기를 마지막으로 갔어요. 마침 그때 전공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옆 방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취미생 반이 있고 전공생은 따로 개인 레슨을 하는데 그 장소를 빌린 사람이 있었던 거죠. 

나도 그 선생님한테 배웠던 적이 있고, 또 그 선생님도 ‘나한테 왜 자꾸 여기 오냐’ 하던 사람인데. 근데 그 (전공생) 언니를 가르치는 장구 소리가 들리는데 정말 완전히 다른 거예요. 장구나 꽹과리는 악기 자체가 투박하니까 전공생과 취미생의 소리가 특히 다르거든요. 근데 소리가 너무 좋고 내가 처음 들어본 소리인 거지. 내가 이걸 취미로 계속한다면 아무도 저 소리를 알려주지 않는 거지. 그래서, 그러면 일단 해야겠군. 이렇게 해서 그냥 했어요. 

진로나 전공을 결정했다기보다는 지금 나는 이것을 해야겠다는 강렬한 느낌을 따르신 거네요.

진로를 고민할 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내가 계속해서 이것만 하면서 살 수 있나, 내가 이걸 그만큼 좋아하나, 내가 그만큼 재능이 있나, 이걸로 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나… 이런 걸 생각했을 때는 답이 없는 거야.(웃음) 그래서 오히려 선택을 못하겠더라고요. 간디 1학년 1학기 때 진로를 고민했을 때는 그랬는데, 오히려 그냥 소리를 듣고 어떤 호기심이 생겼어요. 내가 이걸 계속 할 필요는 없지만 일단은 지금 내가 너무 궁금한 걸 배워놓겠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서 빠르게 결정이 됐던 거예요. 

지금 이 말을 하면서 생각난 건, 아이러니하지만 제가 진로를 선택할 때 저를 제일 편안하게 해준 말들은 오히려 ‘평생 이걸 너의 길로 가져가야 된다’가 아니고 ‘언제든지 다른 길로 방향을 틀 수 있을 거다, 지금 이것이 궁금해서 갔지만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의 것이 올 것이다, 지금 이것을 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네가 살 필요는 없다.’였어요. 사실 저는 연희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을 때는, 그들의 삶처럼 살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냥 그때 이게 너무 배우고 싶었던 거지.

어떤 면에서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얘기가 길어지는데… 기본적으로 국악이나 전통 예술이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식에도 어떤 문제들이랄까, 그런 게 있다보니까… 어떻게 느껴졌을까 그때 당시에? 아마도 ‘재미없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지금 다시 정리를 해봤을 때는요. 일단 간디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좋았던 건 정말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거를 알 수 있었던 거예요. 학교 안에서나 ‘문화의 밤’ 같은 행사를 통해서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볼 수 있잖아요. 저렇게 아주 다양한 길이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재밌는 삶인지를 알게 되어서 저한테는 좋은 학교였거든요. 제 간디학교 졸업 논문 제목도 ‘재밌게 사는 법’이었어요. 어쨌든 나는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재밌게 사는 법이다. 그런데 ‘무엇이 나에게 재밌는 삶인지’ 생각했을 때, 예고 다니는 언니들이나 선생님들을 보면서 그 분야의 위계라든지, 천편일률적인 것들을 계속 반복 수행해야하면서 따라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것들이 당시에는 되게 불편한 느낌이었어요. 어쨌든 제가 속하고 싶은 문화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간디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에 있을 때와 내가 연희를 배우러 갔을 때의 어떤 격차가 굉장히 저한테 심했고, 저한테는 분열적으로 다가왔어요. 

‘분열’이라는 단어가 인상 깊어요. 보통은 간디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그런 경험을 하는데, 기영님은 재학 중에도 지속적으로 분열을 경험하셨겠어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계속 그랬죠. 저는 간디학교의 분위기나 문화가 너무 좋은데 여기서는 소리를 배울 수가 없고 반대로 저기 가면 원하는 걸 배울 수 있지만 문화가 정반대고. 이를테면 굉장히 심플한 예로, 간디학교에 있을 때는 내가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예쁘게 느껴지는데, 딱 그곳으로 가면 내가 정말 못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냥 진짜 물리적 외모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내가 있기에 문화적으로 불편한 곳이었던 거죠.

그래서 내가 이걸 전공했을 때 이 판에서 내가 이들과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이 들었어요. 연희를 배운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가 이걸 공부한 다음에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일까? 이런 고민들에 굉장히 부딪혔죠. 

그 질문들에 당시 기영님이 찾은 답은 어떤 거였나요?

그래도 그때 저를 계속하게 만든 말은, ‘네가 지금 꽹과리를 친다고 평생 꽹과리 칠 필요 없다’ 이런 종류의 말들이었어요. 그다음에도 언제든지 다른 걸 할 수 있다. 근데 지금 궁금한 걸 했기 때문에 그다음으로 넘어갈 길이 보이는 거지, 이 사람들이 무섭고 그 다음이 무섭고 그런 것들이 먼저 무서워서 지금 이걸 안 할 필요 있나? 이렇게 가볍게 생각했을 때 다시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 게 저한테는 가장 힘이 됐어요.

때로는 가볍게 생각해야 먼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거네요. 반면 간디학교에서는 내가 결정한 진로나 삶의 방식을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도 같아요.
그런 분위기가 약간 있죠. 그러니까 이 가치관이 굉장히 가장 대안적이고 좋은 가치관인 것처럼, 밖은 마치 반대인 것처럼 생각되게 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고요. 오히려 그 덕분에 바깥에서 저를 보호할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두 세계를 오가면서 생활하셨어요?
저는 고1 여름방학 때 연희를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어떻게 살았냐면, 주말마다 원지에서 버스 타고 서울 연습실을 갔고 방학 때는 서울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완전 열악한 쪽방 같은 데서 난로 피워놓고 이런 식으로 살았죠. 근데 저는 간디학교 안에서 하는 것들도 되게 열심히 했거든요. 근데 저를 레슨해주는 선생님이 봤을 때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뭐 해외이동학습 가고, 또 졸업논문 써야 된다고 가고, 그러니까 매일 예고 다니는 사람처럼은 못할 거 아니예요. 선생님은 답답하니까 ‘너는 지금 이거를 죽자 사자 해도 안 될 판에 이렇게 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이러면서 예고로 전학을 가라고 권유를 했어요. 

근데 그때 제가 생각했던 거는, 이것도 나한테 너무 중요한 삶의 시기이고, 간디학교라는 환경도 내가 지금만 누릴 수 있고 그 안에서 배울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인데, 내가 고등학교 시절을 대학교를 가기 위한 걸로 갖다 써야 된다는 게 말도 안된다는 거예요. 그걸 자각하면서 ‘선생님 저 근데 사실 재수해도 괜찮다, 제가 지금 간디학교에 와서 3년 동안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걸 잘 배우는 것도 제 인생에 되게 중요해서 저는 이런 식으로 병행하겠다’ 이랬더니 선생님이 ‘미친년’이라고 했지만.(웃음) 정말 다행히 재수를 안 하긴 했지만 저는 그런 마인드였거든요. 진짜 재수를 하더라도 일 년 더 공부하면 또 그만큼 더 늘겠지. 간디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내가 포기해서 대학을 일 년 당기는 게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을 해서 저는 동아리도 많이 하고 학교에서 이것저것 진짜 많이 했어요.

연희 외에 간디학교에서는 어떤 것들을 열심히 하셨어요? 

기억에 남는 게 저는 ‘역사사랑’을 했었고, 당시가 ‘BK 러브*’ 시절이어서 우리 맨날 시위하고 그랬어요. 제가 그때 또 ‘역사사랑’ 동아리 회장이었어요. 그때 ‘코다’랑 ‘펴라’랑 ‘역사사랑’이 주축이 되어서 ‘우리 선생님을 지켜주세요’ 이러면서 릴레이 단식하고, 진주에서 문화제도 열고… 그때 활동을 완전 빡세게 했죠.

저는 그 시기에 되게 힘들었어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내가 지금 선택해야 될 게 뭐지? 뭐가 더 중요하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여기에 완전 힘을 실어야 될 것 같고. 또 그때가 광우병 논란 시기였기도 해서 긴장이나 투쟁의 에너지가 학교에 되게 많이 감도는 와중에 자기 중심을 찾는 게 어려웠어요. 저는 만약 ‘싸운다’고 표현한다면 싸움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거를 그때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집회하고 시위하고 그런 것만이 세상에서 내가 운동을 할 수 있는 방식일까?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거든요. 열심히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약간 힘에 부치고, 나랑 안 맞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래도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죄책감 같은 게 들기도 하고요.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드는 죄책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가야 되는지, 또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방식으로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이런 고민을 깊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지금도 그 고민이 해결된 건 아니지만요. 그때부터 ‘내가 대안을 만드는 방식은 무엇일 수 있나’ 그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정말 몸이 열 개인 사람처럼 고등학생 시기를 보내셨네요.

간락연도 했어요. 그때 고3 밴드에서 진짜 재밌었는데. 축제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완전 잘 놀아주는 밴드를 보통 남자들이 하잖아요. 근데 그때 남자 드러머가 없어서 제가 했었어요. 그리고 ‘펴라’도 했고. ‘솔뫼바람’도 했고. 연애도 열심히 했고. 그때 수업도 다 재밌었고요. 저는 음악 관련된 수업을 다 들었거든요. 수능을 안 봐도 됐었기 때문에 수능 관련 과목은 안 들었고요. 좀 실험적인 과목들만 들었는데 너무 재밌어가지고 수업도 열심히 했죠. 짱쌤하고 뮤지컬 만드는 프로젝트 수업도 제가 대본 써서 했었고. 친구들하고도 ‘우리끼리 재밌는 프로젝트 하자’ 이러면서 자잘하게 많이 했고. 그리고 저는 자연이 되게 좋았고, 뛰어다니면서 애들이랑 쑥 캐러 다니고 그랬어요. 완전 풀(full) 에너지로 재밌게 보냈던 기억이에요.

간디학교 생활만으로도 벅찰 텐데, 한 사람이 소화해야하는 양이 엄청났겠어요.
그러게요. 어떻게 했나 싶어요. 물론 힘들었죠. 학교 일과를 마치면 저녁에 고래집에서 혼자 연습하고, 그걸 매일 못한다는 거에 또 스트레스 엄청 받고. 주말마다 원지에서 버스 타고 서울 가면서 막 울었어요. 애들은 다 원지에서 진주 놀러 가는데 나는 이제 골방으로 가는 거잖아.(웃음)

그런 에너지는 타고난 걸까요? 10기가 에너지가 남달랐다는 후일담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글쎄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꼭 다 그랬던 건 아니고… 10기가 에너지가 좀 유별나긴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그만큼 중도 하차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러니까… 살아남아야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그건 좀 미안한 마음도 있죠. 어쨌거나 저는 살아남는 쪽이었으니까. 애들이 기운이 세고 활발하다 보니까 중간에 학교를 나가는 사람들도 많고 중간에 들어오는 사람도 많은 기수였고 아무튼 좀 유별난 기수긴 했어요. 다 장단이 있을 거예요. 재밌는 애들도 많았지만 아픈 애들도 많았고요. 쓰러지는 친구들도 있었고, 또 식구총회나 이런 게 열렬했으니까 그 말의 ‘독’ 때문에 아파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높은 에너지에 따라오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저도 그때 ‘간디학교에는 왜 이렇게 아파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나’를 많이 감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간디학교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우리 사회에 많은 건데 간디에서는 그런 게 수면 위로 많이 드러났던 거 같아요. 특히 우리는 10대니까 어쨌든 좀 더 쉽게 구부러질 수 있는데, 그거에 대한 케어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았다는 느낌이에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이름 하에 케어해줘야 할 면과 자유롭게 놔둬야 할 면에 대한 구분이 아직 확실하지 않은 학교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거든요. 

그러니까 학교라는 곳이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케어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 또 허용할 수 있는 거지? 우리는 10기니까, 학교가 이제 10년밖에 안 됐으니 아직 그런 부분에 대한 갈피를 잡는 중이라서 이렇게 힘든 건가? 이러면서 그 선에 대해서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다방면으로 하드 트레이닝의 시간이었네요. 1, 2학년 때와 비교해서 졸업이 가까워진 3학년 때는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고1 때 이제 그 마음으로 시작해서 연희를 계속 배우기로 했죠. 연희 자체가 근데 대학이 몇 개 없어요. 연희를 배울 수 있는 곳 자체가 당시 저한테는 한예종 하나였기 때문에 그냥 거기를 가서 공부를 더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했듯이 열어두자는 마음이었죠. 저는 고3이 됐다고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고1 때부터 쭉 하던 연습이나 준비를 계속 했어요.

3학년 인턴십 기간에도 늘 가던 연습실에 가셨다고 들었어요.
저는 수능을 안 봤기 때문에 학교 생활도 거의 비슷했어요. 고3 되면 갑자기 수능 준비로 탁 돌아서는 경우도 있잖아요. 근데 저는 그전부터 계속 병행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걸 유지하면서 갔어요. 그 생활이 빡셌지만서도 그래도 간디학교 때문에 내가 숨통이 트였다 싶어요. 

3학년이 되고 본격적인 진로 고민을 시작한 친구들에 비해 일찍 진로를 정하신 거잖아요.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너는 그냥 쭉 ‘네 것’을 가지고 가면 된다는 부러움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저도 쭉 담담하게 했던 건 아니고 고2때였나, 너무 힘들어서 때려치우려고 했어요. 그때 합숙하면서 연습하고, 거의 지옥 훈련처럼 하고 하니까 죽을 것 같은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고 여러모로 너무 힘들어서 다 때려치우자 이랬다가 다시 잡았다가… 사실 되게 굴곡이 많아요. 쭉 담담하게 했다기보다는.

그때 저희 학년에서 아예 수능 거부 운동을 하는 쪽도 있었고, 수능을 엄청 열심히 준비하는 쪽이 있어서 부딪침이 많았거든요. 토론도 많이 일어나고 감정적으로도 긴장이 되게 컸는데 저는 이제 거기서 중간인으로서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중간인’이라는 위치가 어렵기도 했을 것 같은데, 대학 진학이나 진로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 셨어요?

저는 대학을 가야 해서 갔던 건 아니었어요. 연희를 계속 공부하기 위해서, 근데 거기에 선생님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 그걸 보고 대학을 가겠다고 생각했던 건데, 또 나는 운이 좋게 수능을 안 봐도 돼. 이러니까 여러 층위에서 저는 그 양쪽으로부터 살짝 비켜서 있는 입장이었죠. 그래서 양쪽의 얘기도 많이 듣고 둘 다 지지하면서도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수능 거부 시위 하는 친구들을 지지하면서도 그쪽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좀 신경 쓰이고, 또 수능 응원 도시락 쌀 때 도와주면서도 또 수능 치는 친구들 쪽에서는 또 나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을 것 같고. (다음호에 계속)

*본 인터뷰는 총 2편으로 나누어 발행합니다. '기영이라는 연결, 연결이라는 공연(2)'는 너머의너머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 윤나은 윤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