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너머를 만들며 나름대로 잘하게 된 일 중 하나는 원고 청탁입니다. (잘하고 싶은 일로는 발행일 지키기가 있습니다.) 그동안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발 넓은 사람은 못 되어서 가까운 이들부터 모조리 필자로 써먹었고요. 연락한 지 오래된 동기에게 쑥스러운 메시지를 보내고, 얼굴 본 적 없는 선후배에게 뻔뻔하게 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드렸지요.
반가운 마음으로 메일함에 도착한 원고를 읽으면 당연한 사실 하나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그건 한 사람이 한 번에 두 개 이상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는 거예요. 이를테면 ‘행복해?’라는 물음을 받고 동시에 ‘응’과 ‘아니’를 발화할 수 없듯이요. 그 불가능이 자꾸 누군가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쓰고 읽는 때, 양극 사이를 진동하는 말들을 모두 공유하는 불가능한 일이 이따금씩 가능해지는 것 같거든요. 마치 한 사람이 하는 합창처럼요. 

그러고 보니 원고 청탁은 제가 좋아하게 된 일에 더 가깝네요. 여전히 적당량의 용기가 필요하고 매번 설레요. 혹시 너머의너머에 글을 싣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문 두드려 주시고요. 기꺼이 합창을 들려주신 필자 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날이 덥지요? 물은 자주, 끼니는 꼭 챙기셔요. 

  

  

기영이라는 연결, 연결이라는 공연(2)

 

그런 시간들을 통과한 뒤 연희과에 입학하셨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희과’라는 학과가 생소하기도 하고 또 독자 분들이 궁금해하시기도 할 것 같은데, 연희과는 어떤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나요?

  연희과에서 다루는 전공 실기는 풍물, 무속, 탈춤, 그리고 전문예인집단연희라고 해서 줄타기나 인형극 같은 것들이 있어요. 한예종에서 전통예술원 연희과를 만들면서 이런 것들을 다 통틀어서 연 희라고 부르기 시작한 거예요. 탈춤도 춤이긴 하지만 연주와 재담과 소리가 같이 들어있고, 무속이나 풍물도 마찬가지잖아요. 딱 ‘무용이다’ ‘음악이다’ 가를 수 없이 춤, 음악, 놀이, 예술, 제의 같은 것들이 분화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던 시기의 것들을 다루는, 원형적인 거죠. 이것들이 민중 예술이고 천대받던 것들이잖아요. 연희과를 만들 때도 ‘이건 놀이지, 예술이 아니다’ 이런 취급을 받았다고 해요.

  연희과에 입학하기 위해서 익혀야 하는 내용이 많았어요. 만약에 풍물 전공을 선택했으면 그 안에서 꽹과리잽이인지, 장구잽이인지, 북잽이 인지, 소고잽이인지 또 선택하는데요. 꽹과리잽이라고 해도 장구 연주를 할 수 있어야 되고, 소리 시험도 보고, 기악 연주에 장단도 맞출 수 있어야 하고, 글쓰기 시험도 있었고. 최근에는 창작 연희 시험도 생겼다고 들었어요.

 

여러 가지를 다루지만 주로 다루시는 악기가 꽹과리라고 들었는데요. 꽹과리는 기영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아직도 잘 모르겠는… 애증? 심플한 악기잖아요. 쇳덩어리를 나무 막대기로 치는 거니까. 근데 그걸로 어떤 소리들을 만들어내야 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악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꽹과리를 전공 악기로 했던 이유는 단순했어요. 제가 작아서.(웃음) 그런데 꽹과리도 절대 가벼운 악기가 아니더라고요. 제가 다양한 것들을 하고 싶어 하는 성향인 것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장구가 기본 악기니까 대부분 시작을 장구로 하는데, 다른 악기를 더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꽹과리를 선택할 거잖아요. 모든 꽹과리잽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펼쳐지는 성향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하나를 지긋이 해온 장인 같은 분들을 보면 존경심과 열등감을 느끼는데, 저는 호기심도 많고 이것도 배우고 싶고 저것도 배우고 싶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했던 작업이 악기가 가지고 있는 진동이나 파동과 내 몸의 관계, 공간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악기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나와 주고 받는 영향을 처음부터 다시 만나는 중인 것 같아요. ‘나는 꽹과리잽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탐구를 통해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찾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간디학교를 떠나 대학이라는 새로운 곳에 소속된 느낌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어느 대학이든 그렇겠지만 간디학교에 비해서 위계 질서가 강하고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점들이 있었어요. 연희라는 장르 특성상 다른 과에 비해서도 공동체를 강조하는데, 간디학교도 공동체를 강조하는 곳이었잖아요. 저한테 공동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 있으니까 ‘공동체’라고 얘기하면서 사실 공동체가 아닌 상황들을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다’ 라는 건데, 일례로 연희과는 발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항상 전 학년이 함께 발표회 준비를 하거든요. 졸업 작품도 그 해에 졸업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만들어야 해요.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하면 이상하잖아요. 너랑 나랑 우연히 졸업을 같이 하게 됐는데 작품 하나를 같이 만들어야 되는 거죠. 특히 졸업 작품은 발표회 수준이 아니고 어떤 작업을 할지 일년 동안 논의하거든요.

  선후배 사이의 위계나 선생님의 힘도 강하고요. 그 안에 좋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잘 지내기도 했지만, 그 문화가 바라는 방식으로 제가 뭔가를 계속 해나가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또 제가 다닐 때는 페미니즘적인 관점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고 차별이 장르 특성 마냥 당연하게 여겨졌어요. 예를 들어 여자한테는 ‘남자처럼 한다’고 칭찬한다든가, 역할 정할 때도 ‘여자애들은 힘이 딸려서 안 된다’고 한다든가. 당시에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문제를 해석하기보다 불편한 감각만 가지고 있었고 저도 모르게 체화하기도 했어요. ‘내가 더 열심히 해서 남자보다 잘해야지’ 하면서.

 

그런 문화 속에서 어떻게 자기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과 생활을 할 수 있으셨나요?

  저도 환경을 많이 타는 편이고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나 자체가 바뀌는 느낌이 들거든요. 정말 다행이었던 건 그 시기에 한예종에 입학한 간디 졸업생들이 많았어요. 덕분에 그 친구들이랑 자주 만나면서 숨통이 트였던 것 같아요. 그 곳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아닌 건 아니라고 하면서 나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계속 그곳에만 있으면 지치잖아요. 가까이에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희과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재밌게 공부하면서 그것들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있었지 그 문화에 너무 젖어들진 않는 방식으로 지냈던 것 같아요.

 

대학이라는 환경이 기영님에게 가져다 준 변화나 성장도 있었을 것 같아요.

  질문을 받으니까 생각 났는데, 고등학생 때까지 이야기를 하면서는 제가 ‘소리’에 대해서 많이 말했잖아요. 근데 한예종은 무용원, 연극원, 영상원 같이 여러 예술 분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보니까 다양한 공연을 많이 보게 되거든요. 학교 안에 워낙 공연이 많으니까 그런 게 자극이 많이 됐어요.

지금 저는 움직이는 공연을 많이 하거든요. 처음 무용원에서 하는 현대무용 창작공연을 봤을 때 움직임이나 어떤 몸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렇게 ‘탁’ 열리면서 ‘어, 나도 추고 싶다’라는 욕망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더 움직이고 싶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다. 연희에도 움직임이 있지만 조금 더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는 과 작업만 해도 바빠서 다른 걸 거의 할 수 없었는데, 일종의 씨앗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졸업 이후에 ‘즉흥’이나 ‘움직임’ 같은 것들을 더 찾아다니게 됐죠.

 

방금 말씀하신 ‘가능성’이나 ‘씨앗’이 그 이후에 기영님이 하신 창작 작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계속 ‘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희과는 어쨌든 기예를, 테크닉을 배우는 곳이잖아요. 저는 ‘까라면 까’ 이게 학교에서 제일 힘들었어요. 우리는 공동체니까 까라면 까라는 거죠. ‘안 그러려면 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죠.

  열아홉 살 때도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대학 입학 전부터 나는 연희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것들을 가지고 계속 창작 작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연희를 전공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통 예술이나 국악이 기이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간디학교 다닐 때 저는 ‘과제연구’ 같이 스스로 연구하는 수업들을 많이 선택했는데, 사실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같은 게 그때 다 시작됐어요. 테크닉은 주말에 서울 가서 레슨 받으면서 배우고, 그런 고민은 간디에서 한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하셨고, 그 고민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키셨나요?

  왜 국악이 동시대에 이런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 왜 예술이라고 붙여져 있는데 예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그러니까 저는 감각적으로 얘가 존재하는 방식이 예술이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과제연구’ 수업 때도 최근의 창작자들을 연구한다든지, 논문이나 저널에서 ‘지금 국악의 현 주소 같은 게 어떻다’ 이런 자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전통 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간디학교 자체가 예술을 좋아하잖아요. 어? 나 분명히 예술학교 준비하는데 친구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거는 내가 하고있는 거랑 다른 거 같네.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하는 건 예술이라고 안 할 것 같은 거야. 그게 너무 이상한 느낌이라 ‘어떤 방향으로 가야 내가 지금 충분히 예술을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 이런 고민을 시작했죠. 그때 뭔가 예술가가 되고 싶었나 봐요.

  그런데 한예종에서는 그런 사유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없는 거죠. 너무 뭔가를 빨리, 많이 배워야 되고 그런 질문이 막 올라와도 혼자서 해결해야 하고…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계속 있었거든요.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지식순환협동조합(이하 지순협)’이라는 대안 대학에 들어갔어요.

 

굉장히 강도 높은 대학 생활을 마치시고 바로 또 대안 대학에 들어가신 거네요.

  어떻게든 졸업 작품까지 마치고 나니까 전부 다 소진된 느낌이었어요. 내가 너무 비어 있는 것 같은 거예요. 앞으로 내가 뭔가를 한다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지, 또 어느 좌표에 있는 얘기를 내가 지금 하고 싶어 하는 건지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고요. 4년 동안 그런 것들은 하나도 공부하지 못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목마름이 있었을 때 지순협이라는 학교가 생긴다는 기사가 떠서 바로 갔죠. 지순협 1기로 들어가서 학교가 처음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2년 동안 거기서도 빡세게 했어요.

 

현재 활동하고 계신 팀인 ‘연희집단 갱’도 그 시기에 시작하셨죠.

  연희과 졸업 작품을 만들 때, 어떤 작품을 할까 논의하다가 제 아이디어가 채택되는 바람에 처음으로 연출 역할을 하게 됐거든요. 그때 졸업 작품을 같이 했던 멤버들 중에서 작업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는 분들이 같이 팀을 만들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팀이 그냥 만들어졌어요. 제가 만든 건 아닌데 만들어지고 나니까 ‘그때 네가 연출했으니까 네가 대표해야지’ 해서 얼떨결에 팀 대표가 됐어요. 그렇게 병행하면서 지순협에서는 인문학적인 공부들을 열심히 하고, 창작 작업에 지순협에서 배운 것이나 영향 받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지순협 졸업을 했고, ‘갱’은 지금 8년이 넘어 9년차에 접어들었어요.

 

짧은 말로 담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연희집단 갱’에 대해서 소개해주신다면요.

  저희가 지금까지 온 이야기가 매번 새롭게 해석이 되거든요. 다양한 관점과 시선이 있고 계속 설명을 다르게 하게 되어서 저도 재밌는데요. 일단 ‘연희집단’이 수식어고 ‘갱’이 팀 이름이에요. 꽹과리 ‘갱’ 소리인데 처음과 끝의 소리라는 뜻이에요. 꽹과리 둘, 장구 하나, 그리고 가야금 하는 멤버가 있고요. 그리고 아트 디렉터, 드라마터그 역할을 하는 멤버도 있어요. 그렇게 팀원은 여섯 명이고, 매번 영상이나 사진, 조명 등으로 함께해주시는 협업자들이 있어요.

  표현 재료는 연희가 중심에 있는 팀이고요. 주로 전통, 전통 연희 또는 전통 공연 예술이라는 것이 동시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어떤 조건들 속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 불편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팀이라 그런 고민을 다양한 형태로 풀어낸 것 같아요. 비슷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그때그때 달라져요. 공연 예술이 메인이긴 하지만 전시나 영상 작업을 하기도 하고, 거리예술을 하기도 하고요. 현재는 연희자의 몸에 포커스를 두고 작업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희집단 갱(이하 ‘갱’)’이 지금은 벌써 9년차 팀이 됐는데, 초반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처음에는 외딴 섬 같았어요. 연희를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뭐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고, 심지어는 관심이 없어요. 계속 전통에 대해 질문하고 있긴 하지만 전통 연희 판에 저희가 가지를 않으니까. 근데 막상 컨템포러리 작업을 하는 다른 분야 사람들은 연희를 잘 모르죠. 오랫동안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지만 우리끼리 그냥 간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예술 분야 사람들과 함께 어떤 담론을 만들 수 있는 네트워크가 없는 외로운 팀이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다행히 우리 안에서는 재밌게 작업을 하면서 우리만의 역사를 쌓아왔죠.

  최근에는 다른 작업자들과 만나는 일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어요. 지순협을 졸업할 때쯤 저에게 또 다른 목마름이 생겨났는데, 몸이 너무 답답한 느낌인 거예요. 즉흥적인 움직임이나 몸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곳곳에 있는 워크숍들을 막 찾아다녔어요. 움직임 워크숍이나, 보이스 즉흥, 컨택 즉흥, 거리예술… 이런 분야를 찾아다니면서 자기 작업을 해나가는 친구들하고 많이 친해져서 다양한 사람들이 ‘갱’ 작업으로 오고 가는 흐름이 생기고 있어요.

 

사람들이 모여 작업을 함께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팀으로 작업을 하면서 어떤 걸 느끼셨나요?

  최근에 느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제가 프리랜서 퍼포머로서도 활동을 하다 보니 다른 작업에 들어 가서 다양한 시스템에 위치하는 경험을 계속 하게 돼요. 그러면서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이랑 무대 밖에서 연습을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따로가 아니라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고 결국 다 드러난다는 걸 확연하게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제가 무언가가 도구화되는 것에 유독 예민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건 퍼포머일수도, 공연이 다루는 내용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공연 자체일 수도 있어요. 공연 자체도 이를테면 작가의 욕망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거죠.

  ‘갱’을 만들 때부터 위계가 작동하지 않는 방식에 대해 많이 이야기 했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제자리에 잘 있는지를 살피고 그가 할 말을 다 하고 있는지, 목소리가 서로 들리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찾아가는 게 어쩌면 작업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요. 그런 환경을 만들면 그걸 통해서 만들어지는 작업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감각이 저한테 자연스럽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도 끝까지 듣는다’라는 모토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거든요.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말 이해했는지 해석을 다시 들려주기도 하고 서로 통역해 주기도 하고요. 서로 언어가 너무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비효율적이거나 너무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하죠. 그러다보니 중간에 나간 멤버도 많지만 그럴 때도 충분히 기다리고 이야기 나누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떠난 사람들과도 계속 좋은 사이로 지내요. 그 시간을 같이 보내고 견디려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비효율적’일 수도 있는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해온 ‘갱’ 또한 현실과 무관할 수 없을 텐데, 경제 활동과 관련한 얘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갱’을 길게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오히려 자본의 논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어요. 맨 처음에는 어쨌든 멤버들이 계속 팀 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안정적인 경제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하잖아요. 이미 예술계 시스템 자체가 그러기 어렵긴 하지만, 어떻게든 돈 되는 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갱’은 다른 데서 할 수 없는 걸 여기서는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자기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삼기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빠르게 정해진 게 아니고 갈등을 나누는 시간을 길게 가졌죠. 개개인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필요를 책임지는 곳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갱’이 지속되었던 것 같아요.

  돈이 벌리는 해도 있고, 또 못 버는 해도 있는데 그냥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흐름을 타면서 가려고 해요. 조건이 될 때는 서로에게 충분한 수익이 갈 수 있게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우리가 하고 싶은 작업을 이어가는 근육을 오래 키웠어요.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감각인 것 같아요.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 밸런스에 대한 감각이 사람마다 각각 다를 텐데 어떻게 맞춰나가시나요?

  ‘우리는 돈 안 버는 팀’ 이렇게 정해놓은 건 아니고 그때그때 ‘올해 괜찮아?’ ‘지금 우리 돈 벌어야 되나?’ 이런 얘기들을 계속하죠. 현실의 조건 아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해요. 한번은 이런 적도 있어요. 보통 예술가들이 지원사업을 받아서 작품을 만드는데, 그 자체가 저한테 문제적으로 느껴지는 시기가 있었거든요. 서류 써서 지원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이지만 지원사업에 합격하면 하고, 안 되면 못 하는 식으로 우리가 종속되어 가는 느낌이라 ‘이게 예술 작업을 하는 건강한 방식인가’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시스템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위험 신호를 받아서 그때 제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1월 1일에 한바탕 울고 나서 팀원들한테 편지를 썼어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이러면서…(웃음) 올해는 지원사업 없이 활동해보면 어떨까 제안을 했거든요. 다행히 그때 다들 동의해줘서 일 년 동안 지원사업 없이 자체적으로 저희끼리 공연을 진짜 많이 했어요. 오히려 그러고 나니까 지원사업을 준비해도 좀 더 가벼워지더라고요. 어떤 조건을 우리가 비껴나야 되는 순간도 있고, 이용해야 되는 순간도 있으니까 그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늘 얘기하면서 가요.

 

기영님 개인으로서는 예술과 노동, 혹은 창작 작업과 생계 유지의 균형을 어느 정도로 유지하시는지 궁금해요.

  제가 어떤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나의 단단함이나 호기심의 정도에 따라 들어오는 일을 다 받아볼 수 있는 시기가 있고 거절해야 되는 시기가 있는 거죠. 예전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외부 작업은 잘 안 했어요. 지금은 웬만큼 일정이 맞고 방향이 나한테 너무 문제적이지 않다면 한번 경험해보는 게 괜찮은 시기라는 느낌이 있어서 외부 작업도 꽤 하고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요즘 마음이 풍족해요. 제가 ‘나 요즘 부자 느낌’이라고 그러니까 저희 엄마가 놀렸거든요. 한 달에 수백 씩 버는 사람들도 다 자기 돈 없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벌면서 행복해하는 게 너무 좋다고.(웃음)

 

변화를 받아 들이며 유연하게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가다듬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저는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 편인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조급하고 불안했던 시기가 훨씬 길어요. 그러다 그냥 ‘나는 이 일을 그냥 계속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라는 편안함이 찾아온 순간이 있었고요. 이를테면 제가 ‘갱’에서는 연희와 전통에 대한 작업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즉흥에 빠져있던 시기가 있어요. 몇 년 동안은 두 가지가 극과 극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완전히 다른 두 줄기인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내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힘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시기에 둘 다가 무르익으니까 갑자기 강줄기가 만나듯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더라고요. 그렇게 내 삶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드문드문 찾아 오면서 안심이 됐죠. 어떻게 만날지는 모르지만 내가 해온 것들이 천천히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기 계획이나 고정된 모토가 있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민감하게 살피고 알아차리는 있는 힘이 있으시니까요.

  저는 늘 멀리 떨어져 있는 걸 선택하거나 지금까지 하던 걸 버리고 다음으로 가는 성향이 있어서, 늘 어떤 ‘찢어짐’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또 뭔가를 ‘위해서’ 하는 걸 싫어하고 정말 그 자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있을 때가 좋아요. ‘취미’라는 말을 좋아하고요. 사람들은 저를 한 길을 쭉 걸어온 사람처럼 보기도 하지만 저는 늘 취미 상태를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이는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머리로 생각했을 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색이나 질감의 것들이 어떤 작품이나 공간을 딱 봤을 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그냥 납득이 되잖아요. 기영님의 삶이 그런 느낌이 아닐까 해요.

  아름다운 말이다.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마디 부탁 드려요.

  나 이런 거 진짜 못하잖아…

 

오늘 긴 시간 이야기하신 소감을 말씀해주셔도 좋고요.

  제 삶을 적극적으로 도망쳐 온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를 찾아서 재밌게 작업을 해온 역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폭력으로부터 도망쳐서 나에게 편안한 환경을 찾거나 만들어 온 역사라고도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이를테면 대학을 다니면서도 내가 느끼는 불편함 같은 것들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간디 친구들을 계속 찾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아예 도망치는 건 아니고, 학과 안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한테도 얘기를 해보면서 왔다 갔다 하고. 이후에도 대안 대학을 찾아가고, 워크숍을 찾아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한둘은 꼭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갱’이라는 팀으로 우리에게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어왔고요.

  아주 가끔씩 연희하는 분들이 힘이 되는 말을 전해줄 때가 있어요. ‘갱’ 작업을 보고서, 자기가 답답하고 힘들어했던 어떤 문제 자체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는 일들이 한 번씩 있었어요. 그럴 때 고맙고 힘이 나죠. 내가 어떤 환경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또 스스로 그런 환경이 되면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너머의너머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믿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맞아요. 저는 간디학교를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라고 상정한 적은 없거든요. 제가 연희과를 힘들어 했지만, 그 안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제가 계속 연희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서 찾은 거거든요. 거기서 도망갔지만 함께 도망간 거고. 분명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끼는 예민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얘기하면 서로를 알아보고 일이 일어나요. 모이는 순간 그게 환경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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